오래전 내가 초년 교사 시절 내가 당면한 문제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관용이 부족한 것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 경험도 전무한 상태에서 내가 가진 가치관은 ‘바른생활’이라고 이름이 바뀐 도덕책의 가르침과 학부에서 학습한 ‘교육학’의 이론들이 전부였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선이 나름의 사고방식 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잘못한 아이에 대해서는 응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고 성실한 아이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한 남학생의 당돌한 말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박혀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을 잘 하시고 실력은 뛰어 나지만 인간미가 없습니다.”
생활기록부도 가감 없이 기록해야 하고 그로 인해 고통 받을 아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여 별다른 연민이 없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늘 지도를 받았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고 그것이 공동체의 규율을 바로 세우고 결국은 살기 좋은 학급 또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특히 징계중인 아이가 반성 없이 자숙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모습은 보아 넘기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연말이 되고 학교는 관행에 의해 송년 학술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연극과 노래 등 다양한 순서들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문제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여 징계를 받고 있는 아이들 몇이 합창 단원이었고 음악선생님은 이 아이들이 빠지면 제대로 공연을 할 수 없다고 청원을 하였다. 교장선생님은 허락을 하셨고 나는 그것이 못마땅하였다.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몇 날을 지내다가 어느 주말 오후 산에 올랐다. 옛 시인의 말처럼 서리 맞은 단풍잎은 2월의 꽃보다 붉었다. (상엽홍어이월화 霜葉紅於二月花) -두목(杜牧) <山行> 中- 그래서 한 잎 따다가 책갈피에라도 끼워볼까 하고 아무리 뒤져도 온전한 잎은 찾기가 힘들었다. 갈색 얼룩이 있거나 구멍이 났거나 아니면 지난 태풍에 찢겼거나…….
상처받은 잎이 빨리 붉어지나 보다. 이거다 싶은 이파리를 찾을 수 없어 그냥 어물어물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스무 걸음만 물러나서 바라보면 단풍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제 각각은 흠집투성이인 것들이 팀을 이루니 아름답다. 아이들이 합창을 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녀석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녀석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은 아름답다. 콧등이 시큰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고집불통이고 이기적이고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름다운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울림 때문일 것이다. 며칠 밤을 새며 생활기록부를 고쳤다.
아름다운 왕궁을 지어달라는 왕의 부탁을 받은 건축가는 심혈을 기울여 설계를 하고 각 방에 설치할 아름다운 거울을 외국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상자를 풀었더니 거울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건축가는 안타까워하며 인부들에게 깨진 유리 조각들을 쓸어다 버리라고 했다. 그러자 한 인부가 “어쩌면 깨져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하며 유리 조각들을 벽이나 창에 붙이자는 제안을 했고 건축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리 조각으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벽에 붙였다. 그러자 유리 조각마다 빛이 여러 방향으로 반사돼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왕궁이 만들어졌다. 완성된 왕궁을 본 왕은 감탄하며 인부를 불러 물었다.
“어떻게 깨진 유리 조각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느냐?” “저는 원래 양복점에서 일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옷을 만들고 나면 자투리 천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천을 이어 가난한 사람들의 옷이나 이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때 저는 부자들의 화려한 옷보다 자투리 천으로 만든 옷과 이불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유리가 깨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삶도 깨진 유리처럼 실패나 좌절을 겪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실패와 상처도 아름다운 궁전을 장식한 유리 조각처럼 나를 빛낼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절망 때문에 아름답고, 이별은 상처 때문에 망각되지 않는다.”

▲ 최홍석 칼럼니스트
최홍석
전남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서울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교감 및 교장 정년
[대한민국교육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