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정치는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조롱,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상대를 무너뜨려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는 광장을 오염시켰고, 급기야 역사의 아픔마저 정쟁의 도구로 소비하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어른들의 세상은 매일 같이 뉴스 화면을 통해 ‘타인을 모욕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법’을 아이들에게 실황 중계하듯 보여주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삭막한 토양 위에서 자란 아이들이 기성세대의 나쁜 언어 습관을 닮아가는 것은 어쩌면 예고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최근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 현장에서 발생한 서울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부적절한 응원 구호 논란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씁쓸함을 안겼다.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상처와 희생자들을 비하하는 맥락의 은어들을 경기장에서 외친 사건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역사와 민주시민 교육을 어떻게 해 왔는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사건의 끝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희망의 이정표를 발견했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어른들의 얄팍한 계산 속에서도, 정작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진심 어린 사죄’와 ‘품격 있는 포용’을 통해 어른들보다 훨씬 더 성숙한
언젠가 진료실에 보호자가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밤새 검색한 결과를 인쇄해 온 것이다. 이 증상은 이 병일 수 있고, 저럴 땐 저 병일 수도 있다며 출력물을 한 장씩 넘긴다. 정보는 넘쳤다. 나는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아이가 요즘 어떤가요?" "평소랑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며칠 전보다 지금은 좀 나아진 건가요, 아니면 나빠진 건가요?" 보호자는 답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보이는 증상만 검색했을 뿐, 증상의 정도나 경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호자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검색은 성실함이다. 다만 그 성실함이 이상한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답은 잔뜩 손에 쥐었는데 정작 자신의 견해는 부재했다. 요즘 교실에서도 같은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학생이 독후감 과제를 제출한다. 매끄럽고 오탈자 하나 없다. 그런데 선생님이 물어본다. "그래서 이 책 어땠어?" 학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몰라요. AI가 써줬어요." 정보는 넘치는데 자기가 겪고 판단한 건 비어 있다. AI가 아이에게서 앗아가는 건 문장력이 아니다. '모르는 채로 머무는 시간'이다. 원래 사람은 모를 때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은 낭비가 아니다. 모르
인류의 역사와 문학 속에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특히 성서에 등장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단순한 종교적 서사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대한 골리앗은 전광석화의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AI) 혁명, 글로벌 경제 불균형, 기후 위기와 같은 압도적 도전을 상징한다. 이처럼 거대한 도전을 마주한 다윗은 ‘물매(무릿매)’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무기의 한계를 뛰어넘어 창의적 전략과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작금과 같은 디지털 혁명 시대, 기술 패권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궁극적 해법 역시 창의적 역량과 도전 정신에 기반한 기업가 정신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교육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말한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글로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인재에 달려있고, 그러한 인재를 장기적 안목을 갖고 양성하는 교육이야말로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육과 과학기술, 그리고 경제의 융합적 관점을 탐구해 온 연구자이자 저술가로서, 이번에 대한민국교육신문 칼럼니스트로 참여하게 된
한 해 농사의 풍흉(豐凶)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추수 때이다. 풍작인 줄 알았는데 수확이 허망할 때가 있고 농사를 망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소출이 많을 때도 있다. 사람도 그렇다. 그가 잘 살았는지 잘 못 살았는지는 장례식을 가보면 안다. 어떤 이는 잘 사는 것 같았는데 정작 장례식에 가 보면 싸늘한 분위기이거나 여기저기서 숨겨졌던 이야기들이 수군거려지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저 그렇게 산 줄만 알았는데 미담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정작 정승이 죽었을 때 보담도 그가 기르는 개가 죽었을 때 조문객이 많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력자가 살았을 때는 면전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비위를 맞추던 사람들도 그가 유명을 달리하고 나면 깃털처럼 가볍고 부운(浮雲)처럼 무상한 그 모든 감칠 맛 나던 언어들을 거두어들이고 진심어린 평가들을 쏟아놓는다. 그 동안 숱하게 많은 장례식을 참석했고 어떤 장례식은 단순한 조문객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자로 또는 기도자로 참석한 것도 부지기수다. 장례식의 풍경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그저 무덤덤한 장례식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민망한 장례식도 있다. 기도를 부탁받았을 때 고인에 대한 어떤 위로도 부활에 대한 소망도 말
최근 무너진 교권과 위태로운 교육 현장을 지키기 위해 창설된 가상의 특별 교육 기관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소위 사이다 결말에서 느껴지는 통쾌감 덕분에 드라마 시청률은 높아졌지만, 교육 문제는 해결 과정과 방법도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커졌다. 드라마 결말과 상관없이 오늘도 전쟁터와 같은 학교에 출근한다. 교무실 문을 열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교사 ○○○’라는 이름표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는다. 그 이름표는 수시로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주지만, 때로는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척박해진 교육 현장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 뒤에 따라오는 무게를 견디다 보면, 어느덧 퇴직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365일 퇴직 대기자’가 된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정년퇴직한 장정희 선생님의 「존경 따위 넣어둬」는 그런 우리의 고단한 어깨를 가만히 다독인다. 우리의 일과가 그렇듯 이 책의 목차는 1교시로 시작해서 6교시로 마무리된다. 시간표에 맞춰 학생들을 만나고 수업을 이어가는 교사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성적과 입시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개성과 재능이라는 씨앗을 숨긴 채 살아가는 학생들, 그 곁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는 ‘대적반란(大寂反亂)’ 중이다. 교실 문을 열면 때로는 전등불을 켜지도 않은 채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 모두 도를 닦으며 수행 중인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모두 고개를 45도 숙인 채, 영혼을 스마트폰 블랙홀에 저당 잡힌 모습이다. 선생님이 “얘들아” 하고 불러도 돌아오는 건 무음의 메아리뿐이다. 가히 ‘액정 화면 속의 무릉도원’에 빠진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제는 국가가,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학교 내 스마트폰 수거를 골자로 한 ‘폰 프리(Phone-Free) 스쿨’을 선언했다. 이를 두고 교육계 일각에서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뜻이다. 왜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시간을 12년 전으로 돌려보겠다. 여기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보청기’ 오판과 글로벌 트렌드의 ‘역주행’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2014년, 대한민국 인권위는 “학교에서 학생의 스마트폰을 일괄 수거하는 것은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제동을 걸었다. 인권위의 취지는 숭고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학교 현장에 ‘스마트폰 면죄부’를 주
지금은 바야흐로 문해력의 위기임을 학교 현장의 교사는 물론 교육 전문가들이 나서 심각하게 우려하는 상황이다. 널리 회자되는 바와 같이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지루한 사과”로 오해하고,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아듣는 교실의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디지털 원주민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숏폼 영상과 자극적인 텍스트에 중독되는 사이, 생각의 뼈대를 이루는 문해력과 비판적 사고력은 급격히 붕괴되어 왔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교육부는 최근 주목할 만한 종합 대책을 내놓았다. 내년부터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독서교육 집중 학년’으로 지정하고, 2030년까지 교과 연계 독서 수업 모델 1,000개를 발굴하겠다는 것이 골자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6.07.02). 디지털 홍수 속에서 학교를 ‘생각하는 힘’의 보루로 만들겠다는 국가 차원의 책무성 강화는 매우 시의적절하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청사진이라도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하면 한낱 ‘문서상 정책’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이에 필자는 이번 ‘독서교육 집중학년제’가 단기성 이벤트나 교사들의 행정 부담 증가로 끝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