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르는 계절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어느 가을날 오후, 카페에서 만난 딸아이는 평소 즐겨 마시는 커피 대신 건강차를 주문한다. 조금 의아하다. 추운 겨울날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 커피를 즐겨 마시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항상 밝고 명랑한 아이였는데,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진지해 보였다. 딸아이는 찻잔을 매만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뭇거리며 말했다. “엄마...나... 임신했어.” 수줍은 듯 조용히 가방에서 임신테스트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순간, 손끝이 떨렸다. 이 짧은 한마디에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벅참이 파도처럼 밀려 오고 있었다. 딸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기만 한 딸이 아기를 품었다는 일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제 또 다른 생명을 책임질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잊고 지냈던 시간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제 정말 세월이 흘렀구나’ 그 감동 속에서, 불쑥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운 나의 어머니. 딸의 임신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던 이름. 치매로 서서히 기억을 잃고, 결국 나를 떠났던 엄마. 엄마라 부르면 늘 따뜻하게 돌아보시던 그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젤이 잠에서 깨어난다. 가젤은 사자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사자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자는 가젤보다 빠르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사자든 가젤이든 마찬가지이다. 해가 뜨면 무조건 뛰어야 한다. 생존 세계는 처절하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투쟁이 사바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현장에도 있다. 동물의 세계에는 불문율이 있어서 오로지 허기를 면하기 위해서만 사냥을 한다. 그러나 인생의 레이스는 끝이 없다.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빨리 달려야만 한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스프링복(Springbok)은 평소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처음에는 10여 마리가 모여 평화롭게 생활하지만 떠돌이들이나 작은 집단이 합류하게 되고 군집이 커지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앞에 있는 무리들이 풀을 죄다 뜯어먹게 되고 뒤에 쳐진 무리는 풀을 차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리 중 한 놈이 앞으로 가기 위해 뛰기 시작하면 하나 둘 따라 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리의 모든 스프링복이 뛰기 시
가을비 내리는 명절 아침, 글쓰기에 대한 단상 올해 추석 연휴는 다른 해보다 무척 길다. 예전 같았으면 음식 준비와 손님맞이로 분주했을 시간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보낸다. 차례 대신 성묘로 간소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생긴 아침 시간의 여유로움은 혼자 사색하는 시간마저 선물한다. 아무도 없는 이른 시간, 자주 찾던 카페에 앉아 창밖 비 내리는 풍경을 넌지시 바라본다. 가을비에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며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얹고 마음에 떨어진 글을 한 톨 한 톨 줍듯 써 내려간다. 글쓰기, 나를 만나는 시간 글을 쓴다는 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년의 겨울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 안부를 가끔 전하던 작가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사는 게 때론 힘들지요, 그럴 때 어떻게 내려놓으시고, 받아들이시나요?”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금방 답할 수 없었던 그 날의 나를 기억한다. 작가님의 친절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무게감도 실려 있진 않았지만, 수화기를 올려놓으며 내 마음 안에서는 어느새 작은 울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 글을 한 번 써 보는 게 어떨까?’ 사실 그랬다. 어느새 오십, 나는 은퇴 후의 삶
말, 그 무게 가을을 재촉하듯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선배 언니를 만났다. 늘 밝고 당당하던 그녀는 어딘가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장난치며 웃음을 유도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따뜻한 커피를 사이에 두고 창밖을 힘없이 바라보는 언니에게 조심스레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요즘 사람들 말이 무서워. 그래서 요즘 많이 우울해” “별말 아닌 것처럼 던지지만 듣는 나는 그저 작아지는 기분이야”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서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대화 중 툭 던지는 말투, 대놓고는 아니지만 미묘하게 무시하는 듯한 말, 회피하는 눈빛과 함께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라는 말까지. 마치 존재 자체가 필요 없다는 듯한 말들이 조각조각 모여 언니 마음 어딘가를 갉아먹고 있었다. “별거 아닌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계속 남아. 그리고 하루 종일 반복해서 생각나” 나는 그 순간 말이라는 게 얼마나 한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는지 다시금 느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말을 주
잠시 멈출 때, 몸은 비로소 회복 된다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란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나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통계학적 법칙을 말한다. 즉 한 건의 대형 사고는 29건의 경미한 사고와 300건의 사소한 증상이 사전에 발생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칙은 주로 산업재해 예방에서 인용되는 이론이지만, 우리 건강에서도 적용해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몸은 피로가 누적되면 쉬어야 한다는 작은 경고를 끊임없이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이러한 신호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쉽게 치료할 수 있었던 작은 통증이 더 큰 고통으로 이어져 일상생활까지 어렵게 한다. 며칠 전 아침 식사시간, 불편한 느낌이 든다. 거울을 보니 혀에 작은 돌기들이 이러한 느낌을 만든 것 같다. 저마다 취약한 곳이 다르지만, 나의 경우 피로가 쌓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증상, 구내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럴 땐 하루 이틀 휴식을 취하고 나면 쉽게 사라질 증상이지만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찬 나는 차마 휴식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일정에 떠밀린 채, 몸이 애써 보내온 신호를 외면하곤 한다. 처음엔 아주 작은 크
쓸쓸한 은퇴가 아닌 새로운 시작 나는 평소에는 메일을 잘 열어보지 않는 사람이다. 알람이 오면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문자에 이미 익숙해서인지, 나에게 아무런 표시를 해주지 않는 메일에는 다소 소홀한 듯하다. 그런데 오늘은 새벽부터 이유 없이 메일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들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만큼의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내가 애정을 쏟아온 ‘네이버 오디오클립’의 서비스 종료 소식이었다. 2022년에 우연히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알게 되어 나는 채널을 개설했다.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는 일에 특히 어려움이 있었던 나에게, 음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오디오클립을 만들려면 대뵨이 필요했지만, 그 당시 글쓰기가 부족했던 탓에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나의 작업은 결국 멈추고야 말았다. 2024년 여름부터는 새벽 기상을 함께하는 분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매일 2~3분 분량의 짧은 동기부여 메시지를 전달하며, 마치 라디오 DJ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디오 클립은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이어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생각지도 못했던 채널 종료 메일을
어떤 건설회사에서 15년을 일한 베테랑 목수가 어느 날 갑자기 해고되었다. 그는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고 남다른 열심도 있었다. 자신이 해고된 영문을 모른 그는 관리실에 쫓아가 거세게 항의를 했다. 현장 소장이 대답했다. “내가 어제 오후에 현장을 돌아보고 있을 때, 당신은 동료들과 같이 헌 목재를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녹슨 못을 뽑고 있었는데 당신은 못 하나가 뽑히지 않고 머리가 떨어지자 그대로 박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작 못 하나 때문에 나를 해고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못 하나에 불과하지만 누군가는 대패질을 할 텐데 당신이 박아버린 못이 그 사람의 대패 날을 망가뜨릴 것이고 그로 인해 개인도 손해를 보고 우리의 공정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작은 문제이지만 언젠가 당신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 나왔다. 록펠러는 1%의 실수가 100%의 실패를 가져온다고 했으나 목수의 행위는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적당주의 즉, 도덕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노자(老子)는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실제로 100 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