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내 친구는 어려서부터 수영에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해병대 복무를 했기 때문에 물이라면 걱정이 없는 친구였다. 그런 그가 한 번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동해 바닷가에 작살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약간의 풍랑이 일고 일기가 순탄치 않았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검푸른 바다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마터면 불귀의 객이 될 뻔한 사고는 그날 일어났다. 수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이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동료들은 그가 장난을 하거나 유영(遊泳)하는 줄 알았다. 설마 그가 곤란을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채고 가까스로 물밖에 끌어냈을 때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인공호흡을 실시하고 사지를 주물러 겨우 살려 냈을 때 그는 그 순간을 술회했다. 눈앞에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거리며 지나가는데 한 뼘만 더 접근하여 작살을 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더란다. 그러나 한 뼘을 다가가면 물고기도 한 뼘을 달아나고 또 한 뼘을 접근하면 물고기도 한 뼘을 달아났다. 그러나 친구가 정신없이 물고기를 쫓고 있을 때 물고기는 수평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점점 하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숨이 차올랐으나 물고기가 눈앞에
그 말이 더 힘들었어!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과 함께 아파하며, 혹은 견디며 살아간다. 어떤 일은 견딜 만하면서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일은 너무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에게 표현한 것이 혼자서 견딜 만도 못 할 때가 있다. 그건 표현을 했을 때 돌아오는 말 때문이다. 그 말은 위로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제2의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첫 번째 상처로도 매우 아프지만, 두 번째 상처에서는 아픔을 떠나 존재감을 잃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할 생각이나 시도해본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분석도 나온다고 한다. “그 일이 일어나서 힘든 게 아니었어요. 이로 인한 주변 말들과 시선이 죽음으로 몰아간 거 같아요”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주변 말들은 어떤 말들인가? 흔히 있을 수 있는 우리 가정의 모습에서 찾아보겠다. 자녀가 친구와의 문제로 부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엄마, 나 오늘 수업시간에 친구랑 싸워서 선생님께 혼났어” 이럴 때 부모님들은 불안과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게 너는 왜 수업시간에 싸우고 그러니”라고 말이다. 이럴 때 우
받고만 싶은 나! 받고만 싶은 너! 결혼까지 골인하는 만남은 참 신기합니다. 저도 그렇지요! 숨 쉬어온 공간, 향기 나는 공간, 쉬고 싶었던 공간이 다른 곳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사랑의 호르몬이 나와, 둘이 하나가 되어 결혼까지 이루는 것을 보면 신기하지요, 그러면서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결실을 이루게 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것만 같은 사랑도 결혼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마득히 잊혀지곤 하죠. 그리고 우리는 하나씩 내가 다 해줄 것만 같은 것을 ‘네가 나를 위해서 해줘?’라는 식으로 바꿔 버리곤 합니다. 주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날들이 투정과 비난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흔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요.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와 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았어요, 이 친구는 1년 전에도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로 힘들어 저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남편과의 문제는 엉킨 실타래처럼 그대로 남아있었지요. 친구의 고민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기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 하면 자기가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혹은 ‘자기가 잘못한 걸 알아야지’ 더 나아가 ‘나 내 탓
얼마 전 중요한 용무가 있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 가는데도 받지 않았다. ‘사정이 있나보다 기다리면 전화 해 주겠지’하며 기다렸다.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또 걸었으나 역시 받지를 않았고 대꾸도 없었다. 다음 날도 그랬고 며칠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정이 있나보다 했다가 걱정이 되었다가 슬슬 화가 났다. ‘문자라도 하나 보내주든지...뭔가 설명이 있어야 할 텐데....뭔가 오해가 있나?, 아니, 자기는 잘 나가는 사람이고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벼라 별 생각이 나면서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퍼부을까? 돌려서 내 섭섭함을 알아채게 말을 할까?’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고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더 지났고 우연히 다른 이를 통해 그이는 몸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겨 서울의 대형 병원에 입원하여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전화도 할 수 없고 면회도 제한된 상태라고 한다. 충격과 함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이에게 만약 언짢은 문자를 보냈더라면 어쨌을까! 모골이 송연했다. 오해는 사
침지, 여과 - 숫자와 감각 사이 비율, 조율. 비슷하게도 보이는 이 두 단어는 과연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비율(比率)의 사전적 정의는 ‘한 수량이 다른 수량에 대하여 가지는 비’이다. 즉, 수학적으로 둘 이상 수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조율(調律)은 ‘어울리도록 음을 고르거나, 균형이 맞도록 상태를 조정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 두 단어 사이에서 숨 쉬고 있다. 관계를 유지할 때도, 감정을 표현할 때도, 심지어 혼자 있는 순간에도.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할 때, 우리는 비율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일에 쓸 시간, 밥 먹는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 각각의 몫을 정해두고 그 안에 나를 끼워 맞춰보지만, 정해진 비율로는 하루가 부족하기도, 채워지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율이란 과정을 거친다. 생각보다 일이 오래 걸릴 때는 마음의 여유를 조율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공백엔 쉼의 의미를 조율한다. 예상보다 길어진 만남, 지체된 일정 앞에서 우리는 다시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며 나를 맞춰간다. 커피 한 잔을 내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비율과 조율은 필요하다. 몇 그램의 원두에 몇 그램의 물을 부을지, 물의 온도는 몇
조선 중기(인조-효종)의 문신이었던 유계는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민정중이라는 젊은 선비를 만났다. 둘은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니 말동무나 하자며 동행을 했고 얼마쯤 가다가 해는 이미 저물고 날이 어두워졌는데 유계와 민정중은 냇물을 건너게 되었고 부실한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민정중이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물에서 나온 민정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헐어내었다. “아니 이보게 선비, 어째서 다리를 헐어버린단 말인가!” “예, 저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날도 어둡고 뒤따라오는 과객들이 이 다리로 인해 다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헐어 버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유계는 민정중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과연 유계의 생각대로 민정중은 훗날 좌의정이 되었다. ‘나는 이미 건넜으니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낡은 제도나 모순되고 불합리한 규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억울함을 맛보았으니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어설픈 다리를 헐어버려야 불필요한 부상을 미연에 막을 수 있듯이 낡은 제
내가 시인 윤동주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시 저변에 흐르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하던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결 같은 미세한 가책에도 괴로워했고 현실은 일제 강점기이고 암울하기만 한데 자신의 시가 너무 쉽게 씌어 진다고 부끄러워한다. 그에게는 명월을 짖는 밤 개 소리마저도 자신을 질타하고 꾸짖는 소리로 들린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과거가 있길래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다지도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일제(日帝)에 빌붙어 정작 부끄러운 짓을 한 자들은 작위(爵位)를 받고 부(富)를 축적하는데 그는 조국이 처한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에게 분노와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시 속에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미움, 가엾음, 그리움의 감정들이 교차한다. 그가 얼마나 내면 깊숙이 성찰과 반성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맹자는 생전에 ‘군자에게 있는 세 가지 즐거움’, 즉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하면서 두 번째 즐거움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을 말했다. 맹자는 또 사람의 본성 네 가지를 말하는 가운데 수오지
(업무) 메일 잘 쓰기 2: 단어 선택 잘하기 지난 시간에 이어 ‘메일 잘 쓰기’ 둘째 시간이 돌아왔다. ‘업무 메일 잘 쓰기 1’에서는 ‘첫인사하기’와 ‘보내는 사람 이름 쓰기’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둘째 글의 주제는 ‘단어 선택’이다. 메일에 어떤 단어를 쓸 것인지 하는 ‘단어 선택’ 기준은 글을 쓰는 이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문맥에 맞는 단어, 이해가 잘되는 단어 쓰기는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할 단어 선택 기준일 터이니, 이에 따라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참고’와 ‘참조’이다. 글을 읽다 보면, 글쓴이의 의도를 일일이 물을 수는 없지만, ‘참고’와 ‘참조’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실제로 이 단어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동일한 문맥인데 누구는 ‘참고’를 쓰고 누구는 ‘참조’를 쓰는데, 직관적으로도 ‘참고/참조’가 동의어는 아니라고 느끼기에 묻는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이 두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다. ‘참고’는 ‘살펴서 도움이 될 만한 재료로 삼음’이라는 뜻이고, ‘참조’는 ‘참고로 비교하고 대조해 봄’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참고 문헌’이라 하지 ‘참조 문헌’이라 할 수 없는 것으로도 둘이 같지 않음
어떤 초등학교가 있었다. 운동장도 좁고 더구나 낭떠러지가 있어서 자칫 아이들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책 마련을 위한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두 명의 열성적인 교육위원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한 사람은 만약에 대비해 사고당한 아이를 즉시 후송할 앰뷸런스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돈으로 울타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위원회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장시간의 토론 끝에 엠뷸런스를 구입하기로 했다. 속담이 말하는 대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겪는 많은 사건 사고 후 가장 많이 듣는 말들은 ‘인재(人災)’였다느니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느니 ‘안전 불감증’이라느니 하는 말이다. 그것은 산불과 같은 대형 화재나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 시에도 마찬가지다. 올해만 해도 전반기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차마 믿기지 않는 사건 사고가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많이 일어났다. 우리는 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일까? 신임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안전문제를 짚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어느 호텔에서 주방 직원을 채용하는 광고를 내고 면접을 했다. 참가자들에
부족함을 인정하면 협력할수 있다 혹시,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힘들어 본 적 있으세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혹시 ‘난 없는데’ 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저는 조용히 물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함을 바라볼 마음의 공간이 아직 열리지 않은 건 아닌지요? 그 마음조차도 저는 '괜찮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는 인간이기에 부족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과 잘못에 대한 행동을 처벌없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그 잘못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사랑과 이해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우리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꿀 수 있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얼마 전, 딸에게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학교를 잘 다니던 아이가 갑자기 학교를 가기 싫다고 했어요. 눈치를 살피고 마음을 다독이며 들여다보니 요즘 아이들 말로 ‘꼽준다’ 라는 신조어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예전 말로 ‘은따’와 비슷한 표현이더군요. 딸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꼽주는 행동을 해서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가 잘못한게 있는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