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한 학교에 새로 전근을 갔을 때 졸업반을 맡게 되었는데 한 아이가 지각을 했다. 옆의 아이들에게 물으니 그 아이는 전설적인 아이라는 것이다. 먼 시골에서 올라와 홀로 자취를 하는 아이였는데 2교시에도 오고 점심시간에도 오고 심지어는 친구를 보내어 모셔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란다. 어느 날은 시간을 내어 물어물어 먼 곳에 있는 자취집을 찾아갔다. 지각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이는 내 궁금증에 대답하기를 아무리 애를 써도 제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잠이 많을 성장기라 이해는 가지만 이는 필시 늦게 자기 때문일 것이고 반드시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있을 터, 방을 수색하여 만화책 등 두어 상자를 수거했다. 골목 바깥까지 따라오며 애걸하는 것을 달래 협상을 하고 돌려보냈다. 협상의 조건은 단순했다. 남은 기간 지각을 두 번까지는 허용을 해 줄 테니 세 번을 채우지만 않으면 졸업식 날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거짓말처럼 그 후로 단 한 번의 지각도 없이 남은 기간을 마치고 졸업식 날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압류품을 찾으러 왔다. 여지(餘地)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이용할 수 있는) 남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그대, 눈을 뜨고 있는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들이 있다.반면, 분명히 무언가를 했는데도 무엇을 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날도 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불과 몇 시간 전인데도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지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즐거웠거나 의미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때는 대체로 몸과 마음이 같은 시간과 장소에 함께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내일의 일을 걱정하거나, 지나간 일을 되짚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현재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삶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보인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켜지 않으면 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어렵듯,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마음이 들리고, 세상이 보인다. 하지만 늘 하던 일들에는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기가 쉽지 않다. 익숙해진 것들은 우리를 자동조종 모드로 이끌기 때문이다. 오늘 출근길에 보았던 풍경들이 기억나는가?지나온 길의 나무의 색과 모양은 어땠는가? 분명히 눈을 뜨고 걸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많지 않다면, 어쩌면 우리가 보
매일 다니던 익숙한 길이 문득 낯설게 다가오는 날이 있다. 분명 수없이 지나친 공간인데, 유독 그날따라 낯선 이질감이 감돌며 길가의 작은 풍경들이 눈에 콕 박히는 그런 날 말이다. 어느 날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다 우연히 시선이 멈춘 곳이 있었다. 원룸촌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 구석, 생뚱맞게도 황금빛 옷을 입은 누런 소 조형물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태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것인지, 누군가 최근에 갖다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걸 보는 순간 “저게 왜 있지?” 하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붉은 벽돌 사이로 시선을 멀리 던지니, 산 아래 잘 지어진 새 집과 그 앞의 컨테이너, 캠핑카가 눈에 들어온다. '저곳에는 대체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차를 몰고 천천히 나아가며 머릿속으로 저마다의 삶을 상상해 본다. 이 작은 골목 마을은 볼수록 신기한 구석이 많다. 학교 주변이라 학생들의 원룸이 빼곡한가 싶다가도, 한쪽에는 요양원이 있고, 또 다른 골목에는 작은 회사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비가 그친 후면 어디선가 축사가 가까이 있음을 알리는 특유의 냄새가 진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녹음이 짙게 내린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칠레의 거장 루이스 세풀 베다는 동물의 시각으로 인간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생쥐의 친구가 된 고양이』 는 전혀 다른 종의 동물인데도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작가는 이 책들을 통해 자기와 다른 존재를 향한 조건 없는 연대의 중요함과 인간 문명의 탐욕에 대한 경종을 이야기 한다.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또한 달팽이가 만나는 다른 종들 사이에서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자세와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도전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손자의 ‘달팽이는 왜 느리게 움직이는가?’ 란 질문에 답해주는 형식으로 느림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른들을 성찰하게 한다. 평화로운 카라콜(달팽이) 공동체에 살던 한 달팽이는 집단의 구습에 정면으로 균열을 내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느릴까?" 그리고 "왜 나에게는 이름이 없을까?" 동료 달팽이들은 이 터무니없는 질문을 묵살하거나 불편해한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관습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질문자는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반항아'로 낙인찍힌다. 이것은 인간 세계의 풍자이다. 아이들은 질문이
강당에 오백 명이 앉아 있다. 강사는 막힘없이 말했고 부모는 빼곡히 받아 적었다. 집에 와 그 종이를 아이 앞에 핀다. 아이가 물었다. 이거 나 하라는 거야? 대답을 못 한다. 학원 상담실도 비슷하다. 십오 분이면 계획표가 나온다. 지난주 다른 아이가 받아 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회수 백만 개짜리 육아 영상도 그렇다. 댓글에는 효과를 봤다는 사람과 소용없었다는 사람이 나란히 있다. 말하는 사람은 여럿에게 말했다. 듣는 사람은 한 아이를 생각하며 들었다. 그럼 그 강사가 틀렸는가. 아니다. 그는 많은 아이를 겪어 보고 얻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맞는다. 대개 맞는다는 건, 안 맞는 아이도 있다는 뜻이다. 의학에는 NNT라는 숫자가 있다. “이 치료로 한 사람에게 더 좋은 결과가 생기려면, 몇 명을 치료해야 할까?”를 보여 주는 숫자다. NNT가 10이라면, 비슷한 환자 10명을 치료했을 때 치료하지 않았을 때보다 한 명에게 좋은 결과가 더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열 명 중 한 명만 좋아지고 아홉 명은 아무 변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치료를 하지 않아도 좋아질 사람도 있고, 치료를 해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NN
인류 역사상 최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오늘날, 우리는 기술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역사적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거대언어모델(LLM)과 생성형 AI는 이미 인간이 평생에 걸쳐 쌓아야 할 지식의 양을 단 몇 초 만에 정리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 앞에서 교육은 어떤 인간을 길러내야 하는가? 과거의 교육은 지식을 많이 축적한 자를 “지혜롭다” 평가했다. 그러나 AI 시대의 교육 현장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을 여전히 고수하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AI 시대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가르는 기준은 이제는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지식을 대하는 태도와 인간 고유의 본질을 활용하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AI 시대의 어리석은 자는 ‘지식의 소비자에 머무르는 자’이다. 이들은 AI가 내놓는 정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편의성에 자신의 사고를 맡겨버린다. 미국의 기술 철학자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그의 명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인터넷과 정보기술의 과도한 의존은 인간 뇌의 깊은 사고와 집중 능력을 퇴화시킨다”고 경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찍힌 도장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낮달맞이꽃 꽃말: 기다림, 보이지 않는 사랑 아침에 햇살이 흘린 노란 웃음 저녁까지 사랑을 피워낸다. 요즘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야외학습장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 아이들이 달려옵니다. 저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사랑합니다!” 그것도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외칩니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까르르 웃으며 다시 뛰어갑니다. 어느 날은 한 남자 아이가 저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 손, 일주일 동안 안 씻을 거예요.”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집니다.^^ 잠시 잡은 손 입가에 번지는 미소 마음속에 찍힌 사랑의 도장 또 어떤 날은 교장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똑똑.” 문을 열어 보니 아이 다섯 명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사랑합니다!” 인사를 마치더니 또 까르르 웃으며 복도를 따라 도망갑니다. 문 앞에는 웃음만 남겨 놓고 말입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 아마 아이들은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장난을 치는 것이 즐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아이들
1. 칠판을 넘어선 교실, 그리고 새로운 질문 디지털 대전환의 파도 속에서 학교 현장은 급격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칠판과 분필이 익숙하던 자리에는 이제 노트북, 패들렛, 제미나이(Gemini)와 노트북LM(NotebookLM) 같은 AI 에듀테크 도구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첨단 기술이 교실을 채울수록 현장의 교사들이 마주하는 본질적인 질문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과연 기술이 아이들의 마음까지 가닿게 할 수 있을까?“ 2. AI가 대신해 준 것은 '일'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이면 교실 풍경은 늘 비슷하다. 앞줄에서 손을 번쩍 드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빈 공책을 앞에 둔 채 연필 끝만 만지작거리는 아이가 있다. 누구에게는 조금 더 깊은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격려가 절실하지만 45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늘 교사의 발목을 잡았다. 이 지점에서 AI와 에듀테크의 가치가 빛난다. 패들렛으로 학생들의 생각을 모으고, 생성형 AI로 평가 자료의 초안을 잡고, 복잡한 행정 업무와 기록의 부담을 덜어내는 일—AI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건넨 것은 수업의 효율성이 아니라, '아이를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술
오늘날 교실 현장에서 마주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쉴 새 없이 스마트폰으로 숏폼 콘텐츠를 넘기거나 자극적인 게임에 몰두하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심심해요", " 재미없어요"를 되뇐다. 가장 강렬한 디지털 자극 속에 머물고 있음에도 정작 그 자극은 뇌를충족시키지 못하는 '자극 권태'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본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은 인간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동기 부여의 핵심 원동력이다. 하지만 AI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스마트 기기가 선사하는 빠르고 자극적인 보상은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자기 조절력과 인지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독의 원인이 된다. 즉각적인 자극을 무한정 공급받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공허함을 호소하는 이 현상은, 아이들이 높은강도의 자극 속에서도 만족감은 급격히 낮아지는 '도파민 역치'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학교 현장의 도파민 중독은 단순한 스마트폰 사용 시간의 증가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즉각적인 자극에 우선순위를 두어 견디지 못하게 된 인지적·정서적 편향 상태, 즉 '정서적 무감각'으로 발현되고 있다. 도파민 역치가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강렬한 디지털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학생들
일요일 저녁, TV 리모컨을 돌리다 MBC <스트레이트> 방송을 보며 목이 턱 막힌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속도 붙은 지방 소멸”이라는 자막 뒤로 비쳐진 강원도 정선의 한 초등학교 풍경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전교생 10명, 운동회 날 청군 백군을 나누려면 교장 선생님과 동네 이장님까지 계급장 떼고 선수로 뛰어야 겨우 머릿수가 맞는 서글픈 현실이다. 보도에 의하면 전국의 읍·면·동 중 무려 36%가 ‘소멸 고위험군’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세 곳 중 한 곳은 조만간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인구가 줄어드니 학교가 문을 닫고, 학교가 없어지니 젊은 부모들이 보따리를 싸서 대도시로 떠나는 이 잔인한 ‘소멸의 쳇바퀴’를 어떻게 멈춰 세워야 할까? 혹자는 대기업 공장을 유치하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공장 직원들도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은 서울에 두고 주말부부를 택하는 게 현실이다. 결국 정답은 하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떠났던 맹모(孟母)들이 아이 손을 잡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만드는 획기적인 교육 생태계”를 구축하는 신(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세우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