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면 늘 같이 편의점에 가는 친구 셋이 있다. 넷이 모이면 누구도 먼저 "나 학원 갈게"라고 말하지 못한다. 단톡방에 누가 시험을 망쳤다고 올린다. 줄줄이 "나도"가 달린다. 그 한마디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잠들기 전 한 시간은 늘 같은 유튜버와 보낸다. 어느새 말투가 그 사람을 닮아 있다. 동아리 선배가 코딩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귀가 커진다. 나도 한번 해 볼까 싶어진다. 미국의 강연가 짐 론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다섯 사람의 평균이 곧 나라고. 과장처럼 들린다. 그런데 위 네 장면을 다시 보자.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 옆에 있었을 뿐이다. 미국 템플대 심리학자 로런스 스타인버그 연구팀이 2005년에 한 실험이 있다. 306명에게 운전 게임을 시켰다. 신호가 노란불로 바뀔 때 차를 세울지 더 달릴지 고르는 게임이다. 절반은 혼자 했고 절반은 또래 둘과 함께 했다. 결과는 이랬다. 또래와 함께한 쪽이 위험을 더 무릅썼다. 그 차이는 어른보다 13~16세에서 컸다. 어른보다 청소년에게 더 크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친구는 핸들을 잡지 않았다. 옆에서 말을 보탰을 뿐이다. 그러면 좋은 친구만 골라 사귀면 될까. 학생에게는
강당에 오백 명이 앉아 있다. 강사는 막힘없이 말했고 부모는 빼곡히 받아 적었다. 집에 와 그 종이를 아이 앞에 핀다. 아이가 물었다. 이거 나 하라는 거야? 대답을 못 한다. 학원 상담실도 비슷하다. 십오 분이면 계획표가 나온다. 지난주 다른 아이가 받아 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회수 백만 개짜리 육아 영상도 그렇다. 댓글에는 효과를 봤다는 사람과 소용없었다는 사람이 나란히 있다. 말하는 사람은 여럿에게 말했다. 듣는 사람은 한 아이를 생각하며 들었다. 그럼 그 강사가 틀렸는가. 아니다. 그는 많은 아이를 겪어 보고 얻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맞는다. 대개 맞는다는 건, 안 맞는 아이도 있다는 뜻이다. 의학에는 NNT라는 숫자가 있다. “이 치료로 한 사람에게 더 좋은 결과가 생기려면, 몇 명을 치료해야 할까?”를 보여 주는 숫자다. NNT가 10이라면, 비슷한 환자 10명을 치료했을 때 치료하지 않았을 때보다 한 명에게 좋은 결과가 더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열 명 중 한 명만 좋아지고 아홉 명은 아무 변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치료를 하지 않아도 좋아질 사람도 있고, 치료를 해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NN
내가 반려인에게 가장 자주 하는 처방이 있다. 약이 아니다. 매일 산책시키세요. 매일 놀아주세요. 첫 책에도 이건 보호자의 의무라고 적었다. 보호자들은 대체로 수긍한다. 그 시간이 없으면 개는 병이 난다는 걸 아니까. 그 보호자가 집에 돌아가 아이의 한 주를 짠다. 거기서 제일 먼저 지워지는 칸이 방금 그 칸이다. 몸을 쓰고, 뛰고, 친구와 부딪치는 시간. 개에게는 의무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선택이 된다. 지난해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행복하려면 3가지를 챙기세요.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의 ‘자기결정성 이론’에서 가져온 말이다. 내가 정해서 한다는 감각, 내가 잘하고 있다는 감각,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감각. 두 사람이 사십 년 넘게 확인한 건 이 셋이 취향이 아니라 욕구라는 것이다. 잠이나 끼니처럼, 하나가 비면 나머지 둘로 메워지지 않는다. 그때는 마흔 넘은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요즘은 자꾸 아이들 쪽으로 돌려 읽게 된다. 어른이 돈과 시간을 쓰는 쪽은 셋 중 하나뿐이다. 유능성이다. 부모가 인색해서가 아니다. 학원은 얼마를 들여 몇 점이 올랐는지 셀 수 있지만, 아이가 스스로 고른 시간과 친구와
언젠가 진료실에 보호자가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밤새 검색한 결과를 인쇄해 온 것이다. 이 증상은 이 병일 수 있고, 저럴 땐 저 병일 수도 있다며 출력물을 한 장씩 넘긴다. 정보는 넘쳤다. 나는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아이가 요즘 어떤가요?" "평소랑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며칠 전보다 지금은 좀 나아진 건가요, 아니면 나빠진 건가요?" 보호자는 답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보이는 증상만 검색했을 뿐, 증상의 정도나 경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호자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검색은 성실함이다. 다만 그 성실함이 이상한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답은 잔뜩 손에 쥐었는데 정작 자신의 견해는 부재했다. 요즘 교실에서도 같은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학생이 독후감 과제를 제출한다. 매끄럽고 오탈자 하나 없다. 그런데 선생님이 물어본다. "그래서 이 책 어땠어?" 학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몰라요. AI가 써줬어요." 정보는 넘치는데 자기가 겪고 판단한 건 비어 있다. AI가 아이에게서 앗아가는 건 문장력이 아니다. '모르는 채로 머무는 시간'이다. 원래 사람은 모를 때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은 낭비가 아니다. 모르
아이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비슷하다. "몰라요. 그냥 짜증나요." 부모는 이 말을 오래 곱씹는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데 아이는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한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그저 피곤한 건지. 마음은 분명히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이름이 없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기분이 나쁜 건 알겠는데 왜 그런지는 모를 때가 많다. 마음이 복잡한 건 분명한데 말로 풀어내려 하면 막막해진다. 대부분의 감정은 정리가 안 돼서 힘든 게 아니다. 이름이 붙지 않아서 더 힘들다. 최근 본 드라마에서 한 인물이 이런 말을 한다. 자신에게는 사람마다 감정덩어리로 보인다고.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독서 모임을 운영한다. 그러면서 같은 장면을 자주 본다. 시작할 때 어딘가 굳어 있던 표정이 끝날 즈음이면 한결 풀려 있다. 대단한 책을 읽어서가 아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건져 올리는 문장이 다르다. 누군가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 멈췄어요"라고 말하면, 그 한마디에 자기 마음 한구석을 들여다보게 된다. 모임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막연하던 마음에 이름을 붙여 보게
"기대를 좀 내려놓으세요." 요즘 부모 교육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결국 아이를 짓누르는 압박이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성적표를 받아 든 아이의 굳은 얼굴, 진로를 두고 부모와 자녀가 부딪치는 장면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나는 이 조언이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다. 같은 병, 같은 처지의 동물을 두고도 보호자의 태도는 갈린다. 한쪽엔 끝까지 매달리는 보호자가 있다. 가망이 흐릿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며 작은 가능성에 마음을 건다. 다른 한쪽엔 일찍 손을 놓는 보호자가 있다. "이만큼 살았으면 됐다"며 치료를 접는다. 간절히 매달린 쪽이 늘 이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보호자가 마음을 거둔 순간, 회복의 가능성까지 함께 닫히는 경우를 나는 자주 봤다. 관심이 끊긴 자리에선 기회도 줄어든다. 나는 두 딸을 둔 아빠이자, 매일 병원에서 보호자와 반려동물을 마주하는 수의사다. 양쪽에서 오래 지켜보며 깨달은 게 있다. 기대를 완전히 거둬들인 자리에는 응원이 아니라 무관심이 들어선다는 것. 심리학에는 ‘로젠탈 효과’ 또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1960년대 심리학자 로버트
"우리 아이, 책상에 앉혀 공부시키는 게 맞을까, 아니면 일단 밖으로 내보내 많이 경험하게 하는 게 맞을까?" 학부모라면 한 번쯤은 이런 고민 해봤을 거라 생각한다. 요즘 교육 현장에는 한쪽으로 기운 말들이 유행한다. "이론보다 경험이지." "책보다 현장에 답이 있지." 백번 읽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이를 키우면 어느 순간 길을 잃는다. 나는 수의사다. 동물의 해부학과 생리학을 책으로 먼저 배웠다. 하지만 처음 수술대 앞에 섰을 때, 책 속의 그림과 실제로 손에 닿는 장기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책이 쓸모없었을까. 그 반대다. 이론이라는 지도가 없었다면 나는 눈앞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수술이 끝나면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손끝에 닿았던 감촉, 예상과 달랐던 위치, 책에는 한 줄로 끝나 있던 대목이 실제로는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떠올리며 그림을 다시 봤다. 그러자 죽어 있던 그림이 살아났다. 다음 수술대 앞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에서 현장으로, 현장에서 다시 책으로. 그 왕복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나는 한 뼘씩
"인정 욕구는 버려라. 득은 없고 실만 있다." 흔히 듣는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책이 서점에 가득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미성숙의 증거처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절반만 맞는 말이다. 나는 이 통념에 반대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동기를 5단계 욕구 위계로 설명하면서, 네 번째 단계에 타인의 존중과 자기존중에 대한 '존중 욕구'를 두었다. 이 단계에서는 타인의 인정과 존경,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통해 자존감을 형성하려는 욕구가 두드러진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개인의 약점이라기보다 타인과 관계 맺고 공동체 안에서 자리 잡기 위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필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당신이 옳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를 더 압축해서 말하면 '사랑에 대한 욕구'다. 인정 욕구는 사랑 욕구의 유아기 이후 또하나의 변주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다. 이걸 버리라는 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로·직업 특강을 다니면서 받는 질문이 있다. "그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늘 질문을 하나 보탠다. "여러분은 지금 왜 그 학원에 다니나요? 왜 그 학과를 준비하나요?" 대답은 비슷하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작은 목소리. "엄마가 시켜서요." "다들 다니니까요." "그냥요." 탓할 일은 아니다. 아이만 그런 게 아니다. 어른도 그렇다. 왜 출근하는지, 왜 결혼해야 하는지, 왜 그 동네에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답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당연한 거니까, 그냥 하니까. 이번 칼럼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다. '그냥'은 없다. '당연한 것'도 없다. 학원 등록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가장 흔한 풍경은 부모가 먼저 등록하고 아이에게 "오늘부터 다녀"라고 통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서가 거꾸로여야 한다. 아이가 수학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글이 막힌다고 느껴서, 영어 회화가 답답하다고 느껴서, 스스로 "엄마, 이 학원 다니고 싶어"라고 말한 뒤 등록되는 게 맞다. 그래야 비싼 학원비가 제값을 한다. 이유와 목적, 목표를 가진 아이는 학원에 가는 자세부터 다르다. 자기가 채우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끌
진로 상담을 하다 보면 받는 질문이 있다. "어떤 직업이 유망한가요?"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한다. 10년 뒤에도 살아남을 직업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직업의 지형은 너무 빠르게 바뀐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꾼다. 어떤 직업을 택하든 변하지 않는 토대는 무엇인가. 내 대답은 세 가지다. 읽기, 쓰기, 말하기. 이 셋은 재능이 아니라 습관이다. 읽기는 생각의 재료를 만든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막연히 느끼던 것을 누군가 이미 문장으로 정리해 둔 것을 만난다. 그 문장을 빌려 내 생각을 비춰볼 수 있다. 읽지 않으면 생각의 재료가 늘 부족하다. 나는 마흔 전까지 책과 담을 쌓고 살았다. 학창 시절 교과서와 전공서를 제외하면 읽은 책이 열 권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마흔에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 한 권이 다음 한 권을 불렀고, 생각의 폭이 달라지자 삶의 방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읽기는 습관이 될 때 비로소 힘을 낸다. 처음엔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이어가자 시키지 않아도 손이 책으로 갔다. 습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쓰기는 생각을 내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