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킨 속 당신의 모습
껍질,
살면서 역할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였던 시간이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나,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비로소 온전한 나를 만나게 되는 걸까?
일, 삶의 목표와 같이 밖으로만 향해야 했던 시선들은 자주 ‘나’를 잊게 만든다.
문득 외롭다는 느낌이 찾아온 휴일 아침, 감정이 남겨 준 공간 사이로 ‘나’라는 존재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본다.
“때가 왔어. 지금이 온전히 널 만날 시간이야. 외로움이라는 빈 공간을 통해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 그 공간에서 껍질 속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까?”
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회색빛 하늘, 잎 하나 없이 껍질만 남은 듯 보이는 앙상한 겨울나무,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인 그늘진 땅. 여전히 창밖으로 향해있는 시선을 뒤로하고 잠시 눈을 감는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쉬는 숨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본다.
검은 커피 위에 얼굴이 비친다.
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분주했던 마음, 복잡했던 감정도 잔잔한 검은 커피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커피 위에 비친 나를 바라보는 지금,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하다.
잔 안에 멈추어 있는 커피, 마지막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실버스킨의 존재는 잊은 채, 본연의 향미를 품고 차분히 나를 비추고 있는 커피처럼 오롯이 나를 바라보기로 한다.
실버스킨(Silverskin)은 생두를 감싸고 있는 섬유질이 풍부한 얇은 반투명막이다. 커피 열매의 씨앗인 생두를 보호하는 층으로 생두의 표면에 밀착되어 있다. 이러한 실버스킨은 생두가 로스팅이 되는 중에도 뜨거운 열로부터 마지막까지 생두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이다. 그러한 실버스킨이 제때 채프(Chaff)의 형태로 생두에서 떨어지지 않거나, 많이 붙어있게 되면 커피는 쓴맛, 잡미가 느껴진다.
커피 체리 속 작은 씨앗이 비, 바람을 견디며 자라난 시간과 로스팅이 되어, 드디어 본연의 향미를 품은 원두가 되는 순간까지 얇은 막의 형태로 함께 하는 실버스킨.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가족, 선생님, 친구, 지인 등, 내가 놓여 있던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형성된 성격, 감정은 어쩌면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내가 만든 실버스킨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했던 그 시간, 내가 마주한 나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경계가 사라진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텅 빈 나.
검은 커피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던 그 공간에서 희미한 빛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보일 것 그 때, 그 시간이 나의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은 아닐는지.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찾아올 때, 그 감정의 공간을 타인이 아닌 커피 한 잔으로, 자신과 마주해 보면 어떨까?
실버스킨이 채프가 되어 벗겨져야 생두의 고유한 향미가 발현이 되듯, 껍질을 벗고 내밀한 대화로 만난 자신은 고유한 향미가 진동하는 빛과 같은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지 않을까?
지금, 껍질에 쌓인 자신의 모습만 보고 있는 이가 있다면, 외로움을 타인으로 채우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따뜻하고 검은 커피 한 잔을 내어 주고 싶다.
그 안에 비친 당신의 빛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임지윤
KCIGS 센서리 심사위원- 2024 국제요리&제과경연대회 칵테일 라이브 심사위원- 2022 MOC (마스터오브카페) 센서리 심사위원- AST(Authorized SCA Trainer)- Q-GRADER (국제아라비카 감별사)- R-GRADER (국제로부스타 감별사)- 한국외식조리사중앙회 대외협력이사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