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하루를 마치며 학원에서 늦게 퇴근하는 신랑과 집에서 맥주 한잔 나누는 시간이 참 좋다. 특별한 화두가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인생의 동지로서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소중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 좋던 시간들도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드문드문 이루어진다. 신랑은 내 눈과 마주치면 “한잔할까?”라는 이야기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듯하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서 부산스러운 내 모습, 매일 앉아 있어 살이 쪘다고 투정하는 말, 갱년기라 핑계 대며 여기저기 아프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그 좋아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꿀꺽 삼키고만 있다. 맥주가 좋은 이유는 차가움이 바로 입안으로 적셔지기 전에, 마중물처럼 포근히 거품이 먼저 감싸주기 때문이다. 다른 술들에게는 그러한 포근함이 없다. 우리 인생도 거품 위에 존재한다. 사람마다의 거품 정도는 다르다. 맥주를 마실 때 얼마나 흔들었느냐에 따라, 잔에 따를 때 기울기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거품 정도가 다르듯 인생도 얼마나 굴곡이 있었냐에 따라, 그 길을 어떻게 생각하고 걸어왔느냐에 따라 인생의 거품 역시 다를 것이다. 포근한 거품은 따뜻함을 무기로,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을 알면서도 움직이게
마음의 문이 열릴 때 소통은 시작된다 비 내리는 오후 3시, 중년의 남성 한 분이 헌혈의 집으로 들어온다. 두리번거리는 표정에서 매봉 헌혈의 집 방문이 처음인 것처럼 느껴진다. “ 오랜만에 헌혈하러 왔습니다, 여기 헌혈의 집은 처음이네요. ” “ 아 그러세요? 비 오는 날,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넨 후 헌혈 전 체크해야 할 전자문진(問診)을 작성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나의 안내에 따라 문진실에 자리를 앉은 그는 처음과는 달리 조금은 편안해진 모습이다. 오랜만에 헌혈의 집 문을 두드렸다는 그에게 조심히 말을 건네 본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봐요.” “ 사실 작년, 다른 지역에서 헌혈하려 했는데, 헌혈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도 모른 채 지내다가 오늘 혈액이 부족하다는 문자를 받고 왔습니다.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헌혈이 안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치료 중이거나 검사 결과가 정상이지 않을 때이다. 그의 자료를 확인해 본 결과 약 처방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내 생각에 헌혈이 안 되는 이유를 간호사가 설명을 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헌혈자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때 마음의 문이 닫혀서 상
누군가의 내일이 된 헌혈 금요일 아침, 헌혈의 집의 문이 열린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문진실과 채혈실을 오가는 중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 숙인 모습이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그녀를 만났을까?’ 기억을 떠 올리며 생각을 하던 중 그녀도 고개를 들어 나의 눈과 마주쳤다 “어머!” 놀라운 짧은 외침과 함께 웃으며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우리 가족이 자주 이용하는 동네 병원 의사이다. 내가 이사 와서부터 다니던 단골 병원이니 알고 지낸 세월이 10년이 훌쩍 넘어간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듣게 된 슬픈 소식에 난 멍하니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도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을 아들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1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그나마 1주일 전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골수가 잘 생착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그런데 요즘 더 큰 걱정이 있어요. 혈소판 수혈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수혈을 제때 못 받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헌혈을 부탁하고 있답니다. 저도 비록 혈소판 헌
헌혈이 만드는 작지만, 아름다운 변화들 비 내리는 주말 아침, 지하철역에 내려 우산을 펼쳐 든다. 또르르 우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 소리가 내 마음까지 촉촉이 적셔주어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멜로디에 맞춰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본다. 이윽고 도착한 근무 장소는 강남에 있는 헌혈센터이다. 왠지 오늘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것 같다. 서둘러 가운을 갈아입고, 여느 때처럼 헌혈자 맞이를 위한 준비를 한다. 채혈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점검도 하고, 헌혈 후 제공할 급식품도 충분히 준비해둔다. 주말은 평일보다 센터를 방문하는 헌혈자가 많다. 그래서 주말 아침 간호사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비 내리는 날씨지만 평소 주말과 다름없는 예약자 리스트를 보며 호출 벨을 누른다. “딩동” 501번 예약자님 문진실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데 문진실로 들어오는 헌혈자님의 표정이 어둡다. 혈압을 측정하는 동안 이전 헌혈 경력과 검사 결과를 확인해보며 어두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이어서 문진을 하는 중 그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엄마가 헌혈하는 것을 싫어해요.” 미성년자면 간혹 부모 반대가 종종 있지만, 성인
깊은 잠이 혈액을 맑게 만든다 입사한 지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에게도 퇴직이라는 단어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직장이란 울타리 안에 있는 동안은 느끼지 못할 듯한 감정, 불현듯 그날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맞이할까 하는 두려움에 나는 때로 눈을 감는다. 마치 데자뷔처럼 자주 떠오르는 이 불안감의 시작은 어쩌면 인생 후반전 준비가 덜 되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50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듯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떠한지 묻고 싶다. 내 경우, 은퇴까지 남은 시간, 대충 10년이 남은 듯하다. 길다면 길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내가 느끼는 은퇴라는 시간의 길이와 다름을 느끼는 이유를 나의 부덕에서 찾을 때면 나는 나를 잃곤 한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하여 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바로 성장할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하지만 낮에는 직장인으로서, 저녁에는 주부와 엄마로서 1인 3역 이상을 해야하는 처지의 나에게 이런 시간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한가지 길은 바로 수면을 줄여보는 일이었다. 하루 24시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 (present)이지만, 나는 그 선물을 충분히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지 반문한다. 그리
매일 10분, 이것만으로도 하지정맥이 해결된다고? 간호사라는 직업은 서서 일하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나 역시 채혈 간호사로 근무할 때 헌혈센터를 종종걸음으로 다니다 보면 퇴근할 땐 다리가 붓고 무겁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날씨가 더워지면 묵직한 통증이 더욱 심해진다. 내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던 어느 여름날,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하지정맥류(下肢靜脈瘤)는 다리의 정맥 내 판막 이상으로 혈액이 역류하는 것을 포함하여 하지의 표재정맥이 비정상적으로 꼬불꼬불 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질환이다. 이 수술을 받은 후 나는 혈액순환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 역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 바쁜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그때의 결심은 멀어져 가고 일상 속에서 운동은 그저 작심삼일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게 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혈액은 우리 몸의 구석구석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한다. 나이가 들수록 혈관 벽은 두꺼워지고, 탄력을 잃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손발은 차가워지고, 기억력 저하, 만성 피로, 피부 노화 등 혈액순환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갱년기나 노화로
나의 감정과 피의 흐름 유난히 퇴근길이 피곤할 때가 있다. 평소에 흘려 들었을 말이라도 그럴 땐 툭 던지는 어머님의 말 한마디가 내 안에 비수로 박힐 때가 있다. 나쁜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생각은 멈춘다.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보지만 나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이미 몸 안의 혈액의 흐름도 순식간에 변함을 느낀다. 혈류가 빠르게 돌며 심장은 두근거리고, 얼굴은 욹으락 붉으락 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있다.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친구가 많이 서운했다고 뒤늦게서야 말해줘서 당황한 적 말이다. 그럼 나는 말 한다. “아니 그냥 한 말인데, 뭘 그런 일로 그래?" 라며 그의 감정을 종종 무시하기도 한다. 마치 상대가 예민해서 그런 것이지 난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이렇듯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피가 거꾸로 솟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등 우리 몸은 감정에 따라 여러 가지 신체적 반응을 나타낸다. 우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진짜 이유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러한 감정은 어디서 오는지, 그 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