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라는 배부른 소리 “저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 한마디에 깜짝 놀라 잠깐이지만 당황한다. 언젠가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위한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던 적이 있다. 몇 명 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내 차례가 되자 다른 사람들처럼 이름을 시작으로 소개를 하며 한 말이다. 말을 던져놓고 바로 후회가 몰려온다. 왜 필요도 없는 말을 했을까? 어이가 없기도 했고 워낙 말을 잘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려니 기가 죽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맞을까?”라는 깊은 질문 속에 빠지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정말 나는 듣는 것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가 한 말에 동의를 못 하고 고민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디서든 내 의견을 잘 표현하고 싶은 것이 진심이었으리라.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담소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있는 곳에서의 말하기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혹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던 중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걸까? 어떤 경험이 있었기에 시작도 전에 못 할
‘가능한’ 빨리 오세요? ‘가능한 한’ 빨리 오세요! '가능하다’라는 말이 의미가 좋아서인지(‘가능하다’ 뜻: 할 수 있거나 될 수 있다.) 일상에서도, 공공언어에서도 참 많이 쓰인다. 그중에서도 ‘되도록, 가능하다면’이라는 뜻을 나타내어야 하는 상황 맥락이 많다 보니 ‘가능한 무엇을 하세요.’나 ‘가능한 한 무엇을 하세요.’ 같은 표현이 눈에 많이 띈다. 여기에 ‘가능한’이나 ‘가능한 한’을 다 쓸 수 있을까? 답을 말하자면 ‘아니다.’ ‘한’이라는 말이 있고 없고에 차이가 있는데 두 표현이 같을 리가 없다. 여기에서는 ‘가능한 한’을 써야 맞는다. ‘가능한 한’이 맞는데도 ‘한’이 연달아 나와서인지 뒤에 있는 ‘한’을 빼고 ‘가능한’으로 쓰는 경우가 정말 많다. 우리는 상당한 시간 동안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안내문을 보아 왔는데이런 글에는 ‘되도록’ 무엇을 하라든가 하지 말라든가 하는 표현이 많이 나오게 되어 있다. 아래에 보인 경우도 그러한데, 이를 예시로 하여 여기에 쓰인 ‘가능한’이 맞는지, ‘가능한 한’이 쓰이는 문맥은 어떤지 살펴보자. 사진에서 ‘가능한’이 쓰인 문구를 옮기면 • 가능한 서로 마주 보지 않고 한 방향을 바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습관화 노하우를 활용하자 우리는 왜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갑자기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낀다. 즉, 기분이 좋다는 감정이 행복감을 만든다. 또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자유도 느낀다. 이런 해방감, 즉, 이론적인 판단이 아니라 여러 제약을 생각하지 않는 몰입 상태가 그곳에 있다. 따라서 더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기분 좋게 보내는 시간과 몰입 시간을 보다 많이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만들 수 있을까? 행복을 느낀다는 감각적인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뇌는 행복감을 감지하면 세로토닌, 옥시토신과 같은 호르몬을 분비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먼저 결정할 때도 이런 호르몬이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복감을 느끼는 좋은 일을 기다릴 필요는 없고, 먼저 자신이 행복하다고 결정만 하면 된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행복에 관한 대표적인 근대 철학자 세 명중 한 명인 알랭(Alain)은 행복에는 반드시 행동이 동반된다고
누구나에게 쉽지 않은 첫걸음 “드르릉” 차의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는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천천히 떼며, 주차장을 몇 바퀴 돌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좀처럼 늘지 않는 운전실력은 내가 겁이 많아서인지, 시간이 부족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차 산지가 언제인데. 아직 혼자서 운전이 힘들면 어떡해?”하며 걱정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의 운전실력은 1년이 넘도록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작 시동을 거는 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이니 말이다. 아직도 운전석에 앉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나도 괜찮게 운전을 하는 날이 올까.’하는 생각과 함께 주차장을 나오다 불현듯, 빈센트 반 고흐의 첫걸음(first step)이 떠올랐다. 아기의 첫 발짝을 떼는 순간의 광경을 그린 것으로, 평소 고흐가 보여주었던 화풍과는 사뭇 다르게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진 그림이다. 고흐의 첫걸음은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밭을 갈던 아버지는 이제 막 첫걸음을 떼는 자식을 보며,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향해 팔을 뻗는다. 아이의 어머니는 혹여나 넘어질까 뒤에서 아이를 잡아주며, 발걸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부축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당신의 몸은 당신과 화해하고 싶어한다 당신의 몸은 당신과 화해하고 싶어한다 “미안해. 내가 너무 몰랐어. 네가 하는 말을 무시하고 있었구나. 무심해서 미안해.” 누구에게 큰 잘못을 한 것일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사과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이 장면. 사실은 내가 내 몸에 하는 고해성사다. 살면서 처음이다. 왜 몰랐을까? 마음을 알아차리고 돌보는 것만큼 몸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두통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두통을 못 느끼고 살았다는 말보다 그 통증을 무시하고 살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무던히 참고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병원을 찾아 의사와 상담을 하고 필요한 검사를 진행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결과를 듣게 될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마지막에 의사에게 우린 이런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스트레스가 원인입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너무 많이 들어 충분히 예상 가능할 정도다. 언제부터인가 현대인의 모든 문제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스트레스.
귀를 의심했다. 재우쳐 물었다. “정말, 우리나라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고?” “그렇다니까!” 이 대답이 돌아왔을 때의 감격이란, 하!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감격의 전율은 계속되고, ‘노벨 문학상’이라는 글씨만 봐도 어깨가 펴진다. 사실, 진즉에 됐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노벨 문학상에서 번번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기에 노벨 문학상이 우리에게 돌아왔다는 팩트(fact)에 충만히 기쁘고 신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계절도 ‘가을’인데, ‘문학상’ 소식까지, 이런 금상첨화가 만들어지니 올가을은 더더욱, 책 읽기에 우리를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다. 여기저기에서 ‘노벨 문학상’, ‘노벨문학상’이라는 표기가 쏟아져 나와서 이 표기를 매일매일 대하게 되니, 음... 띄어쓰기가 다르네? 하는 생각에도 이르게 되는 모양이다. ‘노벨 문학상, 노벨문학상’ 중에서 띄어쓰기로는 뭐가 맞느냐는 질문을 해 온다. 답부터 말하자면, 둘 다 맞는다. 띄어쓰기에는 원칙과 허용이 있다. 원칙은 ‘각 단어를 띄어 적음’이고, 허용은 ‘붙여 적을 수 있음’이다. 허용 띄어쓰기 범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허용 띄어쓰기가 활발히 적용되는 데가 ‘고유 명사’와
술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술값은 아무래도 싼 쪽이 마음 놓고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한국인의 소울인 소주는 마트에서 산다면 2천 원 내외로 구입 가능하다. (물론 식당에서 마신다면 좀 더 비쌀 것이다) 이런 소주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와인의 가격이다. 와인도 저렴한 것은 1만 원 이하에서 충분히 구입 가능하나, 괜찮은 품질의 와인을 먹으려면 2~3만 원은 지불해야 하며, 특히나 비싼 건 수억 원을 호가할 수도 있다. 겨우 750ml의 알코올이 이렇게나 비싼 일일까? 싶기도 하다. 2018년 10월 13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1945년산 프랑스 최고급 와인 한 병이 6억 원이 넘는 역대 최고가에 낙찰된 것이다. 그 전설의 와인은 바로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 '로마네 꽁띠(Romanée-Conti)' 1945년 빈티지가 55만 8천 달러(약 6억 3천만 원)에 낙찰된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엄청난 가격의 대명사, 누구나 마시고 싶어 하지만 마실 수 없는 전설의 와인, 로마네 꽁띠를 소개하고자 한다. 로마네 꽁띠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 마을의 특급 밭(Grand Cru)인 로마네 꽁띠에서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지금처럼 말은 했어도 그 말을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을 ‘글’로 적을 수 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 일은 바로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우리말을,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렵다고 하고 외국 사람들은 쉽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는 문법 대상으로서 우리말을 대하는 일이 많고, 외국 사람들은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할 때처럼 해당 언어를 그 나라의 자음과 모음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즉 ‘소리’를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일단 집중하기 때문이리라. 우리말이 쉽다는 건 소리를 그대로 자음, 모음이라는 기호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을 ‘표음 문자(表音文字)’라고 하는데, 이는 소리가 있으므로 글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며, 소리와 표기의 상호작용이 활발함을 의미한다. 그럼, ‘돐’로 쓰이던 말이 ‘돌’이 된 이유는... 바로 ㅅ을 발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예전에는 겹받침의 ㄹ과 ㅅ을 모두 발음했지만, ㅅ을 발음하지 않게 되니 그 발음을 표기할 이유는 사라졌고 그래서 표기는 ‘돐’에서 ‘돌’이 된 것이다. ‘돐’이 ‘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번아웃이라는 말은 나와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번 여름에 너무 더웠기에 계속 집에서 책 원고, 블로그와 시 등 글만 쓰고 있다가 9월이 되어 일주일 동안 한국에 잠시 다녀왔다. 대구에서 열린 수필공모전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집에 돌아와서 일상생활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힘이 없어졌다. 심지어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길을 걸어갈 마음이 있는지 등 자신의 방향성도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평소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전쟁과 기아 같은 생명에 위험을 주는 일이 없는 한, 하루를 만족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더 행복해진다. -그런 내가 왜? 며칠 동안 예전처럼 살려고 했지만 못했고, 결국 생산적인 활동을 다 포기해 4~5일 완전한 휴식기간을 보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번아웃 상태가 될 때는 쉬고 싶다고 몸과 마음이 내놓고 있는 신호이다. 그럴 때 정답은 단 하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며칠 동안 평상시처럼 생활하려고 발버둥을 친 이유는 바로 초조감이며, 이 상황이 언제
보통의 하루 “딸랑.”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커피대신 보리차를 마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음료가 진열되어 있는 쇼케이스로 다가가 1+1 행사 중인 보리차를 꺼내 들고는 계산대에 있는 점원과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2000원입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딸랑” 소리와 함께 나는 편의점을 나선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처음 하는 일중 하나는 편의점에 들러 습관처럼 보리차를 마시는 일이다. 간혹, 달달한 무언가가 끌릴 때면 포장된 바나나를 사서 오기도 한다. 이렇게 나의 보통의 하루가 시작된다. 편의점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너무나 익숙해서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의 한 장면이다. 며칠 전,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 교통사고를 당한 비둘기 한 마리가 길거리에 늘어진 모습을 보았다. ‘좋은 곳으로 가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잠시지만 기도를 했던 것 같다. 잔잔한 아침에 찾아온 불편한 장면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는데, 보통의 하루에 상처가 생긴 기분이었다.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25에‘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키워드가 있다. 과거에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였다면, 아보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