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용기 “지금은 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비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있어.” “택시를 부를까?” 건물을 나서려는데, 학생들이 입구에서 서성인다. 교육 중이라 몰랐는데, 점심까지는 괜찮았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로 학생들은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비바람이 잦아들기만을 바랬다. 나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 지금 저 문을 열고 나갔다가는 어떤 상태가 될지 눈앞에 그려졌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그래도 내가 먼저 나서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한발 나섰지만, 장대비에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3단 우산을 핑계 대며 다시금 뒤로 물러섰다. “두두두두두두..............”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했고, 시간은 10여 분이 흘렀다. 몇몇 학생들이 더 이상 늦으면 안 되는 약속이 있는지, 바지를 걷어붙이고 빗길로 걸어갔다.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한 학생은 뒤로 매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감싸고 맨몸으로 빗속에 몸을 던졌다. 빗속의 모습들이 어찌나 대단해 보이던지. 학생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빗줄기가 잦아들자, 나 역시 용기 내어 우산을 펼쳤다. 차가
말이 가지는 힘 얼마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장미 몇 송이를 유리병에 꽂아 식탁 위에 올려둔 날. 늦은 저녁, 학원을 다녀온 아이가 발견하고는 환한 얼굴로 말한다. "엄마, 꽃도 잠을 잔대. 신기하지?" "와 정말? 잠도 잔대? 엄마는 사랑해, 미워해 말하면 알아듣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러자 아이가 장미 가까이 다가가, "사랑해. 사랑해"라고 속삭이더니 나를 보며 웃는다. "식물 역시 사람처럼 높은 의식은 아니지만, 의식이 있대. 그래서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더라.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러니까 식물에도 사람에게도 좋은 말을 많이 해주자.”라고 말을 하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식물은 적대적인 생각 같은 구체적인 위험에도 반응하지만 좋은 감정에도 무심하지 않다. <중략> 날이 갈수록 욕설을 들은 식물은 눈에 띄게 시들어갔고, 반면에 칭찬을 들은 식물은 크기와 건강미가 열 배로 돋보였다. - 식물의 은밀한 감정, 디디에르 반 코웰레르 어디 식물뿐이겠는가? 사람은 식물보다 훨씬 섬세하고 민감한 감정까지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나
매일 닦아내는 것들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말로 가득했던 강의실은 얼음이 떨어지는 제빙기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강의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듯, 수강생들이 사용한 저울을 테이블 아래에 내려놓으며 마감 청소를 시작한다. 에스프레소 머신 청소는 잘 되어있는지, 사용했던 기물은 제자리에 잘 놓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에스프레소머신 위에 접혀 있는 린넨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옮기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린넨을 집어 든다. 멈추어진 발걸음과 함께 마감 청소를 잠시 멈추고,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수업시간 수강생들이 앉았던 자리를 떠올린다. 바리스타 수업을 들으면 가장 먼저 준비하게 되는 린넨과 행주. 수업시간, 가방에서 린넨과 행주를 꺼내는 수강생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다. 대부분 처음엔 비닐봉지에 넣어 가방 안에 조심스레 가져오지만, 수업 회차가 진행되면 린넨과 행주를 가져오는 모습은 각기 달라진다. 가방에 돌돌 만 린넨과 행주를 꺼내는 수강생, 호주머니에 꾸깃꾸깃 넣어 가져오는 수강생, 수업 후 빨지 않은 채 커피 얼룩과 물기가 그대로인 상태로 가져오는 수강생, 깨끗하게 빨아 비닐봉지에 넣어 오는 수강생. 수강생들에게는 시험을 준비
충전과 감사의 시간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 넓게 펼쳐진 그 끝에 둥글고 커다란 달이 걸려있다. “세상에. 저렇게 큰 달이! 슈퍼 문이네.” 수많은 사람이 달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추석(秋夕). 가을 달빛이 좋은 밤이라고 하던데, 유난히도 밝고 큰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뜻이 가슴으로 와닿는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선선한 가을날의 추석을 맞이하진 못했지만, 하늘을 가득 채운 달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넉넉해지는 듯하다. 두 눈에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보름달. 무엇을 빌어도 이루어지게 해줄 것 같은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과거 조상들이 풍성하게 차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가을의 수확에 감사하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추석 명절이 되면, 부모님의 고향을 찾고, 성묘를 갔었다. 그리고 고속도로의 교통체증을 견디며, 명절 연휴를 보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번거롭게 여겨지는 형식들은 줄이고 간소하게 명절을 보내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추석의 의미는 그대로인 듯하다. 가족과 함께 나누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등 추석의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소중한 시간이다
가장 소중한 선물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은 에어컨인 것 같다고 했을 때, ”뭐 그렇게까지.”라며 흘려들었지만,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여름이다. 이 끔찍한 더위에 에어컨에서 쏟아지는 냉기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갑지만, 쉬지 않고 윙윙대는 소리는 늘 귀에 거슬린다. 어느 날 에어컨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다. 시끄럽고 귀찮은 것이란 마음을 내려놓고 소리를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나름의 리듬이 느껴지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때는 마음으로만 듣지 말고 몸 전체로 들으십시오. <중략> 그러면 생각으로부터 주의력이 돌려져서 마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문득, "나는 과연 어떻게 듣고 있지? 집중해서 듣고 있는가? 어떤 마음으로 듣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함께 모여 낭독 독서를 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나는, 그날도 다
국가대표는 누구일까? 커피를 접하기 전에는 커피의 세계에도 대회가 있고, 국가 대표가 있고, 월드 챔피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올림픽에서 종목마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나와 메달을 위한 치열한 경기를 하듯, 커피에도 그런 대회가 매년 있다. KBrC(브루어스 컵), KCIGS(커피 인 굿 스피릿), KCRC(커피로스팅 챔피언십), KCTC(컵 테이스터스 챔피언십), KLAC(라떼아트), KNBC(바리스타) 가 그러한 대회이다. 각 국가에서 열리는 이러한 대회에서 챔피언이 되면 국가대표 자격으로 월드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KBrC : 스페셜티 커피를 제공하는 다양한 방법 중 브루잉을 통해 추출하는 대회 KCIGS : 커피와 스피릿(알콜)이 만나는 커피 칵테일 대회 KCRC : 로스터기로 최고 품질의 스페셜티 커피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기술을 볼 수 있는 대회 KCTC : 서로 다른 커피를 빠른 시간 안에 기술적으로 골라내는 대회 KLAC : 라떼아트를 통해 커피의 예술적인 표현을 강조하고 이를 알리는 대회 KNBC :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열정과 연결성을 찾아 에스프레소, 우유 음료, 창작 메뉴를 제공하는 대회로 바리스타의 프레젠
커피는 고쳐 쓸 수 있을까? 좋아하지 않는 말, 하지 않는 말이 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을 물건에 비유해 쓴다고 하는 용도의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사람의 무엇을 고치고 싶었을까?’, ‘고장 난 물건을 고치듯, 타인을 고친다는 게 맞는 말일까?’,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쳐지는 물건. 그러한 물건에 사람을 비유할 수 있을까?’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오랜만에 들은 이 말에 문득 다른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커피는 고쳐 쓸 수 있을까?’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는 소리, 제빙기에서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강의장 자동문이 열리며 자리에 앉기 시작한 수강생들. 강의실에 들어온 수강생들의 눈길은 강사인 나보다 내 앞에 가득하게 놓인 각종 재료들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맨 앞쪽 테이블 위에 가득하게 놓여있는 시럽과 파우더, 소스, 페이스트 등을 눈으로 살펴보는 수강생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커피의 품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추출할 때 사용하는 커피의 품
가을이 되면 당신은 9월이 되었다. 어릴 때는 9월이 되면 계절은 어느새 가을로 바뀌었지만, 올해는 폭염, 그리고 일본에서는 방금 지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한여름 못지않은 열기가 도시를 뒤덮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이라는 어감 자체가 신기하게도 이미 여름이 지나갔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은 1988년 9월에 다녀온 프랑스 어학연수이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에 올림픽이 열려 그 후, 본격적으로 선진국을 향한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나도 그 어학연수를 계기로 프랑스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프랑스법을 전공한다는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다. 가을과 프랑스 하면 샹송 곡 '고엽(Les feuilles mortes)'도 떠오른다. 애절한 실연 이야기가 담긴 가사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대학생 시절 프랑스어 수업에서 이 가사를 외우는 것이 숙제였던 적이 있다. 암송 시험도 있었지만,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 길어도 외우는 것이 힘들지 않았던 기억이 든다. 나는 작년부터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 이 곡의 슬픈 재즈 멜로디는 색소폰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색소폰으로 애절함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아마 기술
당신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더운 여름.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 막히는 공간에 들어가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에어컨 전원 버튼을 누른다. “윙~” 에어컨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펼치며 차가운 바람을 뿜어낼 준비를 한다. 더위에 다급해진 마음은 좀 더 낮은 온도를 외치며, 최대한 숫자를 낮춘다. 공간의 열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져 사라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차가워진 온도가 지속되다 보면, 또 다른 마음이 올라온다. ‘추운데.. 온도를 올려야 하나..’ 차가운 바람이 살결에 닿으면 더위에 힘들던 순간은 잊고, 이제는 차가운 온도에 적응이 힘들어 투덜거린다. 너무 더울 때는 시원해지기만 하면 좋을 거야 하는 마음이 앞섰다가, 시원한 나머지 추위가 몰려올 때는 다시 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며 변한다. 이래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에어컨 온도를 찾기가 힘든가 보다. 행복 심리학의 선구자라고 알려진 에드 디너(Ed Diener)는 ‘행복은 도달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여행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는 저서 모나리자 미소의 법칙에서는 모나리자의 미소에는 기쁨 83%, 슬픔 17%가 섞여 있다고 하며, 우리의 삶도 기쁨과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 깨어있기를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가장 미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줄기 미풍, 찰나의 느낌, 순간의 눈빛……. 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준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니체가 말한 ‘가장 미미한 것’이란 이런 것이었으려나. 토요일 아침, 나는 달콤한 늦잠에 빠진 아이에게 조용히 다가간다. 한쪽으로 몸을 세워 자는 아이의 뒤편으로 살짝 다가가 살포시 껴안는다. 잠결에도 엄마인 걸 아는지 등을 밀착시키고 내 손을 잡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내게 안긴 아이의 체온이 주는 따스함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나는 가끔 “사람의 체온만큼 따뜻한 게 없더라.”라는 말을 하곤 한다. 어떠한 따스함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온기만큼 따뜻하고 평온하고 허기진 영혼을 채우는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엄마와 아이라는 관계성도 분명 작용했겠지만, 아이에게서 느낀 따스함은 내 마음과 생각이라는 영역을 빠르게 지나쳐서 그 어떤 것에 바로 닿고 있음을 순간 느꼈고 그것만으로 충만했다. 그 말랑하고 심연 같은 느낌을 굳이 어떤 한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