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게 살고 싶어! 아주 오래전, 누군가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때 나는 망설임 없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난 웃기게 살고 싶어요.” ‘웃기게’란 말이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 다른 누군가를 웃게 만들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삶을 대하는 내 태도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지 않게, 어쩌면 희극처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미였을까?. 그때는 막연히 ‘웃기게 살고 싶다.’라는 한 문장이 나의 머리에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웃으며 살고 싶다고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웃으며’가 아니라 난 웃기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럼 웃음은 저절로 따라오지 않을까? 그 후로 다시 누군가와 그런 얘기를 해 본 적도 없었지만, 가끔 나는 ‘웃기게 살고 싶다.’라는 그 말을 생각한다. 동사 ‘웃기다’는 ‘누군가를 웃게 만들다’라는 뜻도 있지만, ‘한심하고 기가 막히게 보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웃기고 싶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었다. 또한, 누군가에겐 자칫 어설퍼 보이고 부족해 보여 답답하게 느껴질 테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삶이 엉성해서 더 좋았다. 여기저기 빈 구석이 많은
커피를 닮은 뱅쇼 차가운 겨울바람이 잠잠해지자 독감은 아닐지라도 감기에 걸리는 수강생들이 늘었다. 커피의 향미를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수업, “콜록, 콜록” 기침을 하는 수강생들이 코가 막혀 향이 느껴지지 않고, 어떤 맛인지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후각과 미각을 이용해 커피를 해석해야 하는 수업에서 코가 막혀 향과 맛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 답답함이 어떠할지 헤아려진다. 느껴진 향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목소리 대신 간간이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오늘은 커피보다 따뜻한 뱅쇼 한 잔을 건네주고 싶은 날이다. 뱅쇼(Vin Chaud)는 프랑스어로 ‘따뜻한 와인’이라는 의미가 있는 음료이다. 중세 유럽 귀족들이 와인에 정향, 계피와 같은 향신료를 넣어 겨울에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음료였다. 이러한 음료가 프랑스에서 레드와인에 오렌지, 레몬과 같은 과일들, 계피, 정향 같은 향신료, 설탕이나 꿀을 넣어 끓이는 방식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뱅쇼가 되었다. 레드와인은 혈액순환을 돕고, 계피와 정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겨울철 감기 예방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는 커피에서도 자주 쓰이는 플래이버 노트(flavor note
낯선 곳에서 만난 새로움 ‘계단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을까.’ 30개가 넘는 계단을 모두 올랐다고 안도할 즈음, 다시 시작된 계단을 보며, 숨이 턱 막힌다. 계단 옆을 보니, 모노레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 같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 생각되어서인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차가운 날씨에도 땀에 젖은 옷을 뒤적거리며 올라탔다. ‘역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배려를 하고 있었군.’하는 마음과 함께, 모노레일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아찔한 감정을 느끼며 최종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 펼쳐진 광경을 보며 새삼 놀랐다. 그곳은 수많은 집이 켜켜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발아래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펼쳐진 부산 중구는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명 같았다. 이곳의 풍경은 단순히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부산 중구는 계단이 많은 도시이다. 지리적으로 그러한 모습이 되었겠지만,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이었으리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지역의 주민들도 많았지만 관광을 온 외국
번쩍하는 순간 그런 날이 있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 잊고 있었던 노래의 멜로디, 그도 아니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제목이, 시간을 거슬러 홀린 듯이 떠오르는 그런 날. 며칠 전 성석제의 소설집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2003년)이 그랬다. 번개가 치듯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맞아. 나한테 그 책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퍼뜩 지나간 것이다. 오랜 세월 책꽂이를 지키고 있었건만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지다 내 손에 다시 들려지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다. 소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시종일관 미소와 깔깔거리는 웃음을 준비하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작가가 그 당시 세태를 풍자한 글들을 읽다 보면 답답함을 느끼기보다 한바탕 웃게 되고, 한심해야 하는데 깔깔거리게 된다. 책에 실린 단편 <누가 염소의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에서는 불법 사냥을 천연덕스럽게 비꼬는데, 알량한 인간 심리에 쿡쿡 웃음이 터지면서도 글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시베리아에서 곰 잡던 시절>은 또 어떤가? 한때 곰의 쓸개가 몸에 좋다며 해외에서 불법으로 들여온다는 뉴스가 한창 오르내리던 게 기억난다. 국가적 망신이니 뭐니
지금. 넘어서는 힘 냉기가 흐르는 차 안에 앉아 시동을 건다. 시동이 걸리는 순간, ‘오늘도 무사하길.’ 하는 마음을 빌어보며, 운전대에 손을 올린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할 수 있지만, 아직도 운전대를 잡는 것이 낯설다. 내가 느낀 운전은 단순히 기술적인 것을 넘어서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아주 고도의 기술 같았다. 신호등, 보행자를 살펴야 했고,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나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차들에 놀라며, ‘운전을 잘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처음인데’ 빗길을 달리는 동안, 정말 여러 번 마음속으로 빌었던 것 같다. ‘브레이크를 잘 밟는 것이 중요할 거야.’ 여러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이토록, 무엇인가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넘어서는 힘이 필요할까?” 지금 나에게 운전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삶의 여러 상황에서 마주하는 도전과도 같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불편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장할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파요 “강사님! 라이트 로스팅이 된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플 수도 있다는데 정말이에요?” 퇴직을 앞두고 커피 공부를 시작한 그녀, 그와의 첫 만남은 커피가 아닌 카페레시피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 앞에서 수업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던 첫 기억,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 걱정을 서서히 불식시키고 있었다. 배우는 것을 즐기고,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며,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커피와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 카톡으로 물어 오는 그녀의 질문에 TV로 향했던 나의 시선을 옮겨 질문을 다시 읽어본다. 라떼를 마시고 배가 아팠다는 경험은 수강생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었지만, 라이트 로스팅 된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플 수 있는지 묻는 건 처음이다. ‘라이트 로스팅된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프다?’ ‘로스팅으로 생성되는 화학 성분들과 복통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나에게 속으로 질문해본다. 라떼를 마시면 배가 아픈 이유는 우유에 있는 유당과 관련이 있다. 사람에 따라 락타아제라는 효소가 부족할 경우, 제대로 분해가 되지 않은 유당이 대장에서 발
공간을 채우는 에스프레소 한 잔 비어있는 강의실에 들어간다. 에스프레소 머신 워머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빈 잔에 눈이 머문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강의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하얀 잔. 워머 위, 컵을 바라본다. 매끄러운 도자기 감촉과 함께 텅 비어있는 컵 안이 눈에 들어온다. 빈 잔을 보니 설 연휴 마지막 날의 아침이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혼자 눈을 뜨고, 마주한 시공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날이었다. 무엇을 할까 망설이다 이어폰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며칠 전부터 내린 눈 위로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허전해 보이던 눈길이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채워지고, 그 발자국 위로 내 발자국을 더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빠른 음악에 맞춰 걷다 문득, 나무 아래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발걸음을 나무로 옮긴 후, 웅크리고 앉아 눈을 자세히 바라본다. 멀리에서 보면 공간 없이 꽉 찬듯했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듬성듬성 눈 사이 공간투성이다. 크기도 조금씩 다르다. 작은 눈들이 쌓여있는 입도를 보니 꼭 에스프레소용 원두가루를 바라보는 듯하다. 원두가루 입도(Particle Size Distribu
겨울이면 생각나는 사람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짙어질 무렵이면,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단발머리에 다리를 절뚝거려, 걸을 때마다 온몸이 기우뚱 거리는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몽실언니’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권정생 작가의 몽실언니는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 세부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이 되면 그녀가 생각나는 이유는 차가운 환경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는 겨울이 그녀와 닳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삶은 여러 면에서 기구하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둘이다. 가난한 떠돌이 아버지와 몽실의 다리를 절름발이로 만든 새아버지 김주사, 어머니 밀양댁과 여동생 난남이를 낳다 세상을 떠난 새어머니 북촌댁이 있었다. 그리고 배다른 동생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까지, 그녀는 책임져야 할 동생도 많았다. 전쟁의 그늘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갔던 그녀의 삶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도 그녀가 살아낸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도 전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가족을 잃거나 고향을 떠나야 하는 난민이 생겨나고
우연이 아니라 갈망이며 필연이다 “당시 나는 독특한 피난처를 찾아냈다. 흔히 말하듯이 ‘우연’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란 없다. 누가 무언가를 꼭 필요로 하는데 제게 꼭 필요한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우연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성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것이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며칠 동안 이어졌던 책 읽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글귀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과 후련함이 파도치듯 밀려오고 나는 그 느낌을 즐겨본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들은 책 곳곳에서 나를 흔들고 깨우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글귀는 저것이었나 보다. 처음부터 <데미안>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어쩌다 시작된 독서 계획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며칠째 풀리지 않는 숙제 앞에서 조급증을 내고 있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인 것이 그 시작이다. 이 책 어딘가 내 답답한 가슴에 숨구멍을 내어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완전한 답이 아니라 실마리가 되어줄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는 희망으로 말이다. 부드러운 겨울 햇살에 고스란히 드러난 책꽂이는,
실버스킨 속 당신의 모습 껍질, 살면서 역할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였던 시간이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나,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비로소 온전한 나를 만나게 되는 걸까? 일, 삶의 목표와 같이 밖으로만 향해야 했던 시선들은 자주 ‘나’를 잊게 만든다. 문득 외롭다는 느낌이 찾아온 휴일 아침, 감정이 남겨 준 공간 사이로 ‘나’라는 존재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본다. “때가 왔어. 지금이 온전히 널 만날 시간이야. 외로움이라는 빈 공간을 통해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 그 공간에서 껍질 속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까?” 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회색빛 하늘, 잎 하나 없이 껍질만 남은 듯 보이는 앙상한 겨울나무,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인 그늘진 땅. 여전히 창밖으로 향해있는 시선을 뒤로하고 잠시 눈을 감는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쉬는 숨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본다. 검은 커피 위에 얼굴이 비친다. 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분주했던 마음, 복잡했던 감정도 잔잔한 검은 커피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커피 위에 비친 나를 바라보는 지금,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