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제비의 자존심』 초등학교 시절에는 붓을 쓸 일이 많았다. 미술 시간에 붓글씨도 쓰고 수채화도 그리고 하는 시간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시간이 결코 기다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괴로움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미술에 흥미가 없거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경제적 능력은 안 되는데 준비물이 너무 많았다. 깜빡 잊는 바람에 또는 살 돈이 없어서 준비물을 못 가져가 혼나던 기억이 많다. 그것마저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지만 어렵게 장만한 도구를 잃어버리고 다시 사달라는 말씀도 못 드리고 다가오는 미술시간을 전전긍긍하며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던 시간들이 많았다. 나는 싸구려 개털로 만든 붓도 없어 풀이 죽어 있는데 족제비 털로 만든 붓으로 위용을 뽐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 왜 특별한지를 그 때는 몰랐으나 훗날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좋아 개털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족제비는 자신의 털을 몹시 자랑으로 여겨 늘 털을 가꾸는데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언젠가 수능 모의고사에 ‘족제비의 자존심’이라는 지문이 있었는데 요지인즉 족제비는 목숨보다 자신의 털을 더 아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적에게
중국의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화씨(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여 여왕(藇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감정을 시켰더니 보통 돌이라고 했다. 화가 난 여왕은 화씨를 월형(刖刑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이번에도 옥 세공인은 쓸모없는 돌이라고 감정을 했고 이번에는 나머지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옥돌을 끌어안고 초나라 산 아래서 사흘 밤낮 을 울어 나중에는 눈물이 마르고 피가 나왔다. 이 소문을 듣고 문왕이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묻자 자신은 ‘형벌을 받아서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옥을 돌이라 하고 올바른 사람을 미친놈이라 욕하는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감동을 받은 문왕이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게 하니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명명했으니 저 유명한 화씨의 옥이다. 《한비자》 화씨(和氏)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화씨지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사마천의
오래 전 시골에 있는 조그만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새로 내부를 단장한 조그만 교회였는데 옹이가 촘촘한 판자로 벽을 두른 예배당에서는 아름다운 무늬와 함께 나무 향이 그윽하게 풍겨왔다. 무척 아늑했다. 잠시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노라니 깨달음이 수묵처럼 스며들었다. 그렇다. 나무의 생채기가 옹이를 만들고 그 옹이에서 향내가 풍겨오듯 내 영혼의 향기는 주로 상처에서 나온다. 난생 처음 미국을 간다고 어린애 마냥 좋아하던 아내가 보름이 지난 다음 돌아왔다. 그런데 썩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돌아왔는데 대자연의 장엄함에 절로 무릎이 꿇렸는지 하필이면 이 세상 최고의 절경 가운데 하나라는 그랜드 캐년에서 넘어졌단다. 보름이 지난 지금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면 자칫 응급 구조대를 부를 뻔 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가 보다. 아무튼 상처 때문에 여행기간 내내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달래다 보니 문득 그 때 보았던 예배당의 옹이가 생각났다. 낫에 베인 상처, 운동회 때 넘어진 상처, 거울을 보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응급실 신세를 졌던 상처 등 내 몸에도 몇 개의 중요한 상흔들이 있다. 세월이 흐른 다음 아픔은 없
한글은 세계가 인정하는 탁월한 문자이자 우리 민족의 자랑입니다. 그 독창성과 과학성은 전 세계 언어학자들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한글을 창제 원리에 맞게 배우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40년에 걸친 저의 심층 탐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오늘날 한글 교육이 훈민정음의 본래 정신에 벗어난 ‘5가지 이론 오류’로 인해 오히려 학습자들을 혼란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통념은 한글을 그저 암기해야 할 복잡한 대상으로 만들고, 그 속에 담긴 세종대왕의 위대한 사상과 과학을 가려왔습니다. 세종대왕의 창제 원리에 기반해, 한글 교육의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훈민정음 5가지 이론 오류, ‘소릿값 규칙’으로 되살리다 저는 『훈민정음 해례본』 원문 분석을 통해 오늘날 혼란을 야기하는 다섯 가지 주요 오류를 지적합니다. 저의 연구는 이를 바로잡아 훈민정음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고, 한글 학습의 근본적인 혼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 정의 : • ‘소릿값’은 ‘ㄱ’이나 ‘ㅏ’ 같은 낱자를 알아들을 수 있게 내는 소리. • ‘발음’은 ‘가’나 ‘족’처럼 완성된 글자(음절)를 알아들을 수 있게 내는 소리. 첫째,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오자서(伍子胥 BC?-BC484)는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공자가 『춘추』에서 매우 우호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문무를 겸한 인물로 용맹하고 지략 또한 뛰어나서 오나라 왕 합려를 도와 오나라를 춘추오패의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사마천이 사기 열전(列傳)을 편집할 때 오자서를 맨 처음에 수록하려 했을 만큼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백비(伯嚭)’라는 간신을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는 과오를 범했기에 열전의 첫 자리는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넘어갔다. 그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고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간신 비무기의 모략에 빠져 아버지와 형을 잃고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망명을 했다. 그리고 기반을 닦은 다음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를 공격한다. 그때 오자서의 둘도 없는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신하였던 사람이 그의 주군과 조국을 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간곡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때 오자서는 “일모도원(日暮道遠) 도행역시(倒行逆施)”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신포서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초나라의 수도로 진격을 했다. 그 말인즉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무니 모로든 거꾸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즉,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이루려 함인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갖은 애를 쓴다. 얼마 전 강원도 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되었을 때 불길이 얼마나 거셌던지 보물 제 479호 범종도 녹아버렸고 이를 복원하는 과정 중에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바람에 세인(世人)의 지탄을 받았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어디를 가든지 열녀문(烈女門)이나 송덕비(頌德碑) 공적비(功績碑) 같은 비석들이 있고 아무개 국회의원이 아무개 군수가 무엇을 지었다느니 길을 냈다느니 하는 치적 자랑이 있다. 그래도 그건 봐줄만 한데 이름난 유적지나 관광지에도 볼썽사나운 낙서들이 있다. 이는 단지 미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나라 망신도 시킨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고 인류의 공통된 욕망이다. 핀란드의 헬싱키 마켓광장에 가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있다. 커이젤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제법 위엄 있게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오랫동안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중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의 자치령을 인정해 주었다는 공로로 이
한 사람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것을 부고(訃告)라고 한다. 올해는 이상 기후 때문인지 유독 부고가 많이 온다. 매번 부고를 접하는 순간 고인과 함께하던 지낸 날들과 고인에 대한 수식어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남게 된다. 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1888년 노벨의 형이 죽었다. 그러자 한 신문사에서 이를 노벨 자신의 사망으로 오인해 사망 기사를 냈고 노벨은 자신의 부고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살아있는 자신을 죽었다고 오보(誤報)를 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 낸 사람’ 심지어는 ‘죽음의 상인(商人)’이라고 지칭한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 3,100만 크로네(단순 환산으로 약 50억원,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약 2,700억 원의 가치)를 노벨상 제정을 위해 내 놓았다. 그 돈을 이용해 전 해에 인류를 위해 가장 뛰어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노벨상은 세상에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