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뜸을 들여야 할까?
어릴 적, 추석이면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인 벼들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보이던 황금빛 일렁임.
할아버지께서 일궈낸 일렁임을 보며 좁은 시골길을 걷다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분홍 꽃잎과 가는 줄기의 떨림이 눈 속에 담기곤 했다.
봄 같은 바람의 살랑임에 설레는 마음으로 대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장대 끝엔 빨간 고추잠자리, 가을볕에 말라가는 빨간 고추들. 손자, 손녀를 반기시던 할머니의 따스한 미소만큼이나 풍성하게 느껴졌던 어릴 적 가을 풍경이다.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나뭇잎, 쌀쌀한 겨울이 느껴지는 바람에 어릴 적 추석 풍경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득 떠오른다.
한 해를 한 달 남겨놓은 11월, 잠시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내 마음의 풍경과 온도에 머물러본다.
나와 인연이 된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그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의 온도는 적정한지 잠시 눈을 감아본다. 마음이 머물고, 생각이 깊어지는 상황과 인연들이 떠오른다.
머릿속을 스쳐 짧게 지나가는 인연,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감정까지 하나하나 건드려지며 머무는 인연 등. 올해 나와 함께 했던 인연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바람에 일렁이는 가을 들녘 같아진다.
긴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마음에 이는 바람을 고요하게 잠재운다. 그리고 고요해진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내리려 발걸음을 옮긴다.
드립포트에 물을 넣어 가열하고,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필터지를 접어 넣는다. ‘또르륵’ 드리퍼를 골고루 적신 물이 서버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린싱이라고 하는 이 과정을 통해 필터지가 드리퍼에 밀착되어 드리퍼 내에 있는 리브(Rib)가 제 역할을 하게 됨은 물론, 서버와 드리퍼가 예열된다.
린싱을 끝낸 후, 20g의 브라질 원두를 계량하고 그라인더에 간다. 린싱한 물이 담겨 있는 서버를 비우고, 드리퍼에 원두가루를 담으며 지그시 바라본다.
오늘은 커피의 향미보다 부드러운 질감과 따뜻함을 더 느끼고 싶은 날이라 뜸을 얼마나 들이면 좋을지 고민해 본다.
뜸을 들일 때는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로스팅 일자와 로스팅 정도이다.
갓 로스팅한 원두 안에는 이산화탄소가 많아 뜸을 들이는 시간을 길게 해 가스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고, 로스팅 정도가 밝을수록 커피 성분이 물에 잘 용해될 수 있도록 뜸을 들이는 시간을 길게 한다.
뜸 들이기는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할 때 커피의 성분이 물에 잘 녹아 나올 수 있도록 원두가루의 2배~3배의 물을 붓고 20초~40초간 기다려주는 시간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사전적심, 블루밍이라고 한다.
‘로스팅한 지 6일이 되는 원두, 뜸시간은 30초, 물은 원두의 2배인 40g을 부어줄까?’
뜸을 들이려 물을 부으니 원두가루가 언덕처럼 위로 봉긋하게 부푼다. 그 모습에 계획을 바꾸어 뜸을 들이는 시간을 2초 늘리고, 원두 안에 있는 커피의 성분들이 물에 잘 용해되어 나올 수 있도록 잠시 더 기다려준다.
뜸이 드는 원두를 바라보니 나의 생각과 감정에 가을 들녘 같은 일렁임을 만든 그녀가 문득 생각난다. 그녀와 회사에서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을 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는 듯하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대화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녀와는 그런 시간도, 대화도 부족했단 생각이 든다.
이름과 나이, 하고 있는 일, 사는 곳 정도가 전부일 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며 여가시간을 보내는지, 취미가 무엇인지와 같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대화는 나눈 적이 없는 듯하다.
뜸 들이기가 끝나고 물을 부으며 그녀와의 대화, 관계를 커피로 바꾸어 생각해본다.
물리적인 1년이라는 시간이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 보내진 뜸 들이는 시간이 되었을까?
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대로 관계의 뜸을 들였다면 그녀와 나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들, 감정들은 서로 이해와 융화의 좋은 향미를 품고 내려오는 커피가 되지 않았을까?
풍성한 가을을 지나 추운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올 한 해의 시간이 관계의 뜸을 잘 들이기에 부족했던 사람이 있다면 커피도 성분이 잘 추출될 수 있도록 뜸을 들이듯, 남은 한 달의 시간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향기 머금고 부드러운 맛이 풍성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기다리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는 겨울이지만 마음만은 가을처럼 올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말이다.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