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공지능(AI)이 온 세상의 흐름을 압도하고 있다. 저 멀리 미국의 휘황찬란한 도시 라스베가스에서는 1월 6일~9일까지 미국 소비자 가전협회에서 주관하는 ‘CES 2026’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영역까지 넘보는 AI 시대, 올해는 피지컬 AI인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 로봇의 진화된 모습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 속에서 당당히 도전장을 던진 우리 기업들의 AI 시대를 선도하는 모습에 진한 감동과 함께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이런 날로 진화하는 혁명과 같은 AI 시대, 교육은 더 이상 지식의 축적만을 목표로 할 수 없다. 이제 학교는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이 질문에 깊이 있고 입체적인 답을 제공하는 세 권의 책이 있다. 미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 교수의 『사피엔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그리고 다중우주론 분야의 최고 권위를 지닌 MIT 물리학자이자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는 ‘생명의 미래 연구소(FLI)’의 공동설립자인 맥스 테그마크의 『라이프 3.0』이다. 이 세 권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하나의 사유 체계를 이루며, AI 시대 필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양극화가 심화된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더 이상 ‘기회의 사다리’가 아니다. 비용이 선결 조건이 되는 경쟁 시장에 이미 깊숙이 진입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일컬어 ‘사교육 공화국’이라 지칭하는지 모른다. 우리의 입시 제도는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과가 갈리는 구조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의 입시는 과연 능력을 평가하는가, 아니면 가정의 경제적 능력을 측정하는가. 한국에서 사교육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오래된 논쟁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사교육 그 자체가 아니다. 사교육이 없어서는 안 되는 구조가 문제다. 학교 수업만으로는 상위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집단적 인식, 입시 정보와 전략이 학원 시장에 종속된 현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묵인해 온 제도적 무책임이 오늘의 사교육 공화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입시 제도는 끊임없이 ‘공정성’을 말하면서도, 정작 출발선의 불평등을 방치해 왔다. 고가의 컨설팅, 선행 학습, 비교과 스펙 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져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비가 오는 날 고속버스를 탔다. 창밖에 내리는 비 때문에 창에 김이 서려서 밖이 보이질 않아 커튼으로 닦아 보았으나 닦이질 않았다. 재질이 나일론 섬유라 그런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손수건으로 닦으니 잠시 후 다시 흐려지기는 했으나 우선은 깨끗이 닦였다. 문득 장마철이 생각났다. 장마가 계속되어 햇빛을 보기 어려운 때는 온 집 안이 습하여 모든 빨래들이 잘 마르지 않기는 하지만 가장 곤란한 것은 수건이다. 손수건 정도야 선풍기 바람에도 금방 말라 버리지만 수건은 오래오래 탈수를 하여도 잘 마르지 않아 불쾌한 냄새가 난다. 수건이 유독 마르지를 않는 이유는 그것이 많은 물기를 보듬어 안기 때문이다. 손수건으로는 눈물이나 땀 몇 방울 정도를 닦을 수 있을 뿐이지만 수건은 목욕 후의 물기도 닦을 수 있고 감은 머리를 말릴 수도 있다. 언젠가는 네 잎 클로버를 따서 아무 생각 없이 책갈피 대신 바인더에 끼워 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클로버 생각이 나서 꺼내보니 그것은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돼버렸다. 비닐이 클로버의 습기를 흡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살면서 고난 없는 사람이 없고 어려움 없는 사람이 없다. 이 때 누군가 넌지시 다가와
크지는 않지만 제법 붐비는 우체국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포 꾸러미와 서류 봉투나 편지 따위를 들고 소포나 등기를 부치기 위해, 다른 누군가는 예금 업무를 위하여 창구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대체로 즐겁지 않다. 지루하고 다리도 아프고 앞 사람이 생각보다 지체할 경우 언짢은 생각이 들기 일쑤다. 안내를 하는 직원이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줄의 맨 끝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 차례는 아직도 멀어보였다. 그래서 다가가 도움이 될까하고 물었다. “할머니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예요. 우표 두 장만 사면 돼요.” “아, 그러시면 저기 자동판매기가 있습니다. 오래 기다리실 필요 없이 동전만 넣고 단추를 누르시면 금방 우표를 사실 수가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우. 허지만 저 기계는 창구의 아가씨처럼 ‘식사는 잘 하는지’ ‘허리 아픈 건 좀 어떤지’ ‘손자 녀석은 잘 있는지’ 이것저것을 자상하게 물어봐 주지를 않잖우.” 누구나 그렇듯이 할머니에게는 우표 두 장 보다도 창구 아가씨의 존중과 친절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중 받고 싶어 한다. 다섯 살배기 손자도 자
Z세대(Generation Z)는 1997년부터 2012년 사이에 태어난 즉, 밀레니얼 세대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유년기부터 스마트폰, SNS, 유튜브 등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며 자란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 세대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함께 성장한 특징이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이들 Z세대가 역사의 흐름을 다시 쓰고 있다. 2020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뒤덮은 촛불 시위의 중심에도, 2022년 네팔 총선에서 신생 정당 래코스트(RSP)를 제1야당 반열로 끌어올리고 여성 총리를 탄생시킨 돌풍의 핵심에도, 그리고 2023년 마다가스카르의 대선에서 “더 이상 가난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외치며 기존 정치권력을 뒤흔든 주력 역시 바로 청소년 Z세대였다. 이들은 더 이상 정치와 경제의 주변인들이 아니다. 이제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미래를 만드는 세대가 되었다. 불가리아 청년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는 단순한 불만이 아니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이 해변을 사유화하고 부패 스캔들이 반복되던 현실 앞에서 그들은 외쳤다. “더 이상 침묵하면, 이 나라는 사라진다.” 그들의 끈질긴 연대는 결국 장기 집권 세력의 몰락, 개혁 내각 출범으로
대한민국 교육이 위기 국면에 처한 것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심지어는 각시도 교육감을 비롯한 교육 전문가들조차 ‘붕괴’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 이는 우리 교육의 민낯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 공감의 정도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을 더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가? 3년마다 OECD를 통해 발표되는 국제학업성취도(PISA)는 비록 세계적 수준이라지만, 정작 학생들의 배움의 즐거움과 만족도는 최하위 수준이고, 교육공동체를 구성하는 교사·학생·학부모 사이의 신뢰는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 현장 곳곳에서 관계의 균열이 심화되며, 학교는 더 이상 배움의 공동체라기보다 갈등의 장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그 방증이라 할 것이다. 이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낙관적이거나 교육 현장의 현실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원로들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직접 “교육대개혁”의 실행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금 “교육공동체 붕괴”라는 진단 앞에서 그 회복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래전 내가 초년 교사 시절 내가 당면한 문제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관용이 부족한 것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 경험도 전무한 상태에서 내가 가진 가치관은 ‘바른생활’이라고 이름이 바뀐 도덕책의 가르침과 학부에서 학습한 ‘교육학’의 이론들이 전부였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선이 나름의 사고방식 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잘못한 아이에 대해서는 응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고 성실한 아이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한 남학생의 당돌한 말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박혀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을 잘 하시고 실력은 뛰어 나지만 인간미가 없습니다.” 생활기록부도 가감 없이 기록해야 하고 그로 인해 고통 받을 아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여 별다른 연민이 없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늘 지도를 받았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고 그것이 공동체의 규율을 바로 세우고 결국은 살기 좋은 학급 또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특히 징계중인 아이가 반성 없이 자숙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모습은 보아 넘기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연말
2025년의 대한민국 교육은 어느 해보다 격변 속에 놓여 있었다. 학령인구의 급감은 학교 체제 전반을 흔들었고, AI 학습 도구의 급속한 도입은 교실의 역할과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지역 간 교육격차는 오히려 심화되며 “출생지에 따라 학업 기회가 결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이에 대해 수많은 논의와 대책이 쏟아졌지만, 정책의 파편화•임기응변식 접근은 현장의 피로만 증가시켰다. 결국 교육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임에도, 우리는 그 방향에 대해 충분히 합의하고 있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올해 특히 아쉬움이 컸던 정책 중 하나는 학교 재구조화에 관한 논의이다. 농산어촌 학교의 통폐합이 빠르게 추진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지역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학생들에게 제공될 교육적 대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졌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전남의 한 소규모 중학교는 통폐합을 앞두었지만, 오히려 지역 대학•기업과 협력하여 ‘작은 학교’의 장점을 살린 프로젝트 기반 수업으로 전국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범 사례는 정책적 지원이 아닌 학교의 자구적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문제는 학교의 규모가 아니
십수 년 전 필자가 고교 3학년 담임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한 여학생은 초중고 총합 12년을 통해 남자 담임은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물론 교직의 여초(女超) 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은 필자 자신이 현장에서 느끼기도 했지만, 교육의 대상인 학생인 직접 느끼고 일종의 개인적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에는 “그럴 수가?”라며 심각한 교사의 성별 불균형 상태에 대해 깨달았다. 이는 밤늦게까지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는 고3 학년부장을 역임하면서도 교무 분장에서 학년 담임 배정 요구 시에 남성 교사를 소속 학년에 함께 하기가 여간 힘들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갈수록 심화 되어 이제는 남성 교사는 각 학년의 ‘천연기념물’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여초 현상이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 초·중·고 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성별 불균형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예컨대, 한 학교에서 학년 담임교사 10명 가운데 남성 교사가 1명에 불과하거나, 아예 전무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단순한 인력 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성장 환경과 교육의 질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를 넘어 학생이 일상적으로 접
중국 춘추 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손앙(公孫鞅)’은(BC390-BC338) ‘상앙(商鞅)’ 혹은 '위앙'(衛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위(衛)나라 출신이었으나 여기 저기 떠돌다 진(秦)나라로 건너가 효공의 눈에 들어 조정의 실권을 쥐게 된다. 그리하여 가족 제도 개편, 중농 억상정책 실시, 토지 제도의 개편과 세제 개혁, 군주권 강화, 그리고 귀족의 특권 제한과 인민의 신분 상승 기회 개방 등 여러 가지 법안을 마련하여 진나라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기타 열국이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강대국이 되었다. 결국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다. 천하통일에는 묵가의 공도 있었지만 상앙이 큰 역할을 했다. 그의 개혁은 엄격한 법의 시행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개혁 당시 기득권층의 엄청난 반발을 초래했으며 효공에게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소가 산더미 같았다. 그러나 상앙은 흔들리려는 효공을 독려하여 변법을 늦추지 않았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처형하였다. 심지어는 공자 ‘건’이 법을 어겼다고 하여 코를 자르는 형벌(刑罰)을 가했고 태자의 스승에게는 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형을 가했다. 조량(趙良)이라는 숨은 현자가 조목조목 충고를 하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