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시골에 있는 조그만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새로 내부를 단장한 조그만 교회였는데 옹이가 촘촘한 판자로 벽을 두른 예배당에서는 아름다운 무늬와 함께 나무 향이 그윽하게 풍겨왔다. 무척 아늑했다. 잠시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노라니 깨달음이 수묵처럼 스며들었다. 그렇다. 나무의 생채기가 옹이를 만들고 그 옹이에서 향내가 풍겨오듯 내 영혼의 향기는 주로 상처에서 나온다. 난생 처음 미국을 간다고 어린애 마냥 좋아하던 아내가 보름이 지난 다음 돌아왔다. 그런데 썩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돌아왔는데 대자연의 장엄함에 절로 무릎이 꿇렸는지 하필이면 이 세상 최고의 절경 가운데 하나라는 그랜드 캐년에서 넘어졌단다. 보름이 지난 지금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면 자칫 응급 구조대를 부를 뻔 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가 보다. 아무튼 상처 때문에 여행기간 내내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달래다 보니 문득 그 때 보았던 예배당의 옹이가 생각났다. 낫에 베인 상처, 운동회 때 넘어진 상처, 거울을 보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응급실 신세를 졌던 상처 등 내 몸에도 몇 개의 중요한 상흔들이 있다. 세월이 흐른 다음 아픔은 없
한글은 세계가 인정하는 탁월한 문자이자 우리 민족의 자랑입니다. 그 독창성과 과학성은 전 세계 언어학자들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한글을 창제 원리에 맞게 배우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40년에 걸친 저의 심층 탐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오늘날 한글 교육이 훈민정음의 본래 정신에 벗어난 ‘5가지 이론 오류’로 인해 오히려 학습자들을 혼란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통념은 한글을 그저 암기해야 할 복잡한 대상으로 만들고, 그 속에 담긴 세종대왕의 위대한 사상과 과학을 가려왔습니다. 세종대왕의 창제 원리에 기반해, 한글 교육의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훈민정음 5가지 이론 오류, ‘소릿값 규칙’으로 되살리다 저는 『훈민정음 해례본』 원문 분석을 통해 오늘날 혼란을 야기하는 다섯 가지 주요 오류를 지적합니다. 저의 연구는 이를 바로잡아 훈민정음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고, 한글 학습의 근본적인 혼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 정의 : • ‘소릿값’은 ‘ㄱ’이나 ‘ㅏ’ 같은 낱자를 알아들을 수 있게 내는 소리. • ‘발음’은 ‘가’나 ‘족’처럼 완성된 글자(음절)를 알아들을 수 있게 내는 소리. 첫째,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오자서(伍子胥 BC?-BC484)는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공자가 『춘추』에서 매우 우호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문무를 겸한 인물로 용맹하고 지략 또한 뛰어나서 오나라 왕 합려를 도와 오나라를 춘추오패의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사마천이 사기 열전(列傳)을 편집할 때 오자서를 맨 처음에 수록하려 했을 만큼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백비(伯嚭)’라는 간신을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는 과오를 범했기에 열전의 첫 자리는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넘어갔다. 그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고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간신 비무기의 모략에 빠져 아버지와 형을 잃고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망명을 했다. 그리고 기반을 닦은 다음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를 공격한다. 그때 오자서의 둘도 없는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신하였던 사람이 그의 주군과 조국을 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간곡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때 오자서는 “일모도원(日暮道遠) 도행역시(倒行逆施)”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신포서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초나라의 수도로 진격을 했다. 그 말인즉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무니 모로든 거꾸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즉,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이루려 함인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갖은 애를 쓴다. 얼마 전 강원도 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되었을 때 불길이 얼마나 거셌던지 보물 제 479호 범종도 녹아버렸고 이를 복원하는 과정 중에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바람에 세인(世人)의 지탄을 받았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어디를 가든지 열녀문(烈女門)이나 송덕비(頌德碑) 공적비(功績碑) 같은 비석들이 있고 아무개 국회의원이 아무개 군수가 무엇을 지었다느니 길을 냈다느니 하는 치적 자랑이 있다. 그래도 그건 봐줄만 한데 이름난 유적지나 관광지에도 볼썽사나운 낙서들이 있다. 이는 단지 미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나라 망신도 시킨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고 인류의 공통된 욕망이다. 핀란드의 헬싱키 마켓광장에 가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있다. 커이젤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제법 위엄 있게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오랫동안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중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의 자치령을 인정해 주었다는 공로로 이
한 사람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것을 부고(訃告)라고 한다. 올해는 이상 기후 때문인지 유독 부고가 많이 온다. 매번 부고를 접하는 순간 고인과 함께하던 지낸 날들과 고인에 대한 수식어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남게 된다. 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1888년 노벨의 형이 죽었다. 그러자 한 신문사에서 이를 노벨 자신의 사망으로 오인해 사망 기사를 냈고 노벨은 자신의 부고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살아있는 자신을 죽었다고 오보(誤報)를 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 낸 사람’ 심지어는 ‘죽음의 상인(商人)’이라고 지칭한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 3,100만 크로네(단순 환산으로 약 50억원,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약 2,700억 원의 가치)를 노벨상 제정을 위해 내 놓았다. 그 돈을 이용해 전 해에 인류를 위해 가장 뛰어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노벨상은 세상에서 가
몇 아이들이 생활지도상의 문제로 줄줄이 불려오고 부모들이 소환된다. 아이들은 별반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어떻게 하면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까 머리를 굴리며 궁리만 하는데 문밖에선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엄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쥐구멍을 찾는 엄마들이 있다. 도대체 이들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자식을 잘 못 낳은 죄? 아니면 잘 못 기른 죄? 죽어라 뒷바라지 한 죄? 도시 모를 일이다. 그 중 한 아이는 문득 지난겨울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신입생 모집이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 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자신을 퇴임 교장이라고 밝힌 그분은 우리 학교에 손녀딸의 입학을 간절히 원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물은 다음 성적도 저조하고 학생부 기록이 너무 나빠 어렵겠다고 정중히 거절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은 눈이 많이 내리고 무척 추웠다. 아직 양지도 올라오기 전 꽤 이른 시각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제 그 노인이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연만한 팔순의 노인이 그것도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어르신이 모자를 벗어 들고 문밖에서 나를 찾았다. 안으로 맞아들이자 눈가에 이슬이 맺히면서 가정사를 얘기했다. 아들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며느리는 떠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내 친구는 어려서부터 수영에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해병대 복무를 했기 때문에 물이라면 걱정이 없는 친구였다. 그런 그가 한 번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동해 바닷가에 작살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약간의 풍랑이 일고 일기가 순탄치 않았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검푸른 바다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마터면 불귀의 객이 될 뻔한 사고는 그날 일어났다. 수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이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동료들은 그가 장난을 하거나 유영(遊泳)하는 줄 알았다. 설마 그가 곤란을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채고 가까스로 물밖에 끌어냈을 때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인공호흡을 실시하고 사지를 주물러 겨우 살려 냈을 때 그는 그 순간을 술회했다. 눈앞에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거리며 지나가는데 한 뼘만 더 접근하여 작살을 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더란다. 그러나 한 뼘을 다가가면 물고기도 한 뼘을 달아나고 또 한 뼘을 접근하면 물고기도 한 뼘을 달아났다. 그러나 친구가 정신없이 물고기를 쫓고 있을 때 물고기는 수평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점점 하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숨이 차올랐으나 물고기가 눈앞에
얼마 전 중요한 용무가 있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 가는데도 받지 않았다. ‘사정이 있나보다 기다리면 전화 해 주겠지’하며 기다렸다.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또 걸었으나 역시 받지를 않았고 대꾸도 없었다. 다음 날도 그랬고 며칠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정이 있나보다 했다가 걱정이 되었다가 슬슬 화가 났다. ‘문자라도 하나 보내주든지...뭔가 설명이 있어야 할 텐데....뭔가 오해가 있나?, 아니, 자기는 잘 나가는 사람이고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벼라 별 생각이 나면서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퍼부을까? 돌려서 내 섭섭함을 알아채게 말을 할까?’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고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더 지났고 우연히 다른 이를 통해 그이는 몸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겨 서울의 대형 병원에 입원하여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전화도 할 수 없고 면회도 제한된 상태라고 한다. 충격과 함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이에게 만약 언짢은 문자를 보냈더라면 어쨌을까! 모골이 송연했다. 오해는 사
조선 중기(인조-효종)의 문신이었던 유계는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민정중이라는 젊은 선비를 만났다. 둘은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니 말동무나 하자며 동행을 했고 얼마쯤 가다가 해는 이미 저물고 날이 어두워졌는데 유계와 민정중은 냇물을 건너게 되었고 부실한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민정중이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물에서 나온 민정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헐어내었다. “아니 이보게 선비, 어째서 다리를 헐어버린단 말인가!” “예, 저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날도 어둡고 뒤따라오는 과객들이 이 다리로 인해 다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헐어 버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유계는 민정중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과연 유계의 생각대로 민정중은 훗날 좌의정이 되었다. ‘나는 이미 건넜으니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낡은 제도나 모순되고 불합리한 규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억울함을 맛보았으니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어설픈 다리를 헐어버려야 불필요한 부상을 미연에 막을 수 있듯이 낡은 제
내가 시인 윤동주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시 저변에 흐르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하던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결 같은 미세한 가책에도 괴로워했고 현실은 일제 강점기이고 암울하기만 한데 자신의 시가 너무 쉽게 씌어 진다고 부끄러워한다. 그에게는 명월을 짖는 밤 개 소리마저도 자신을 질타하고 꾸짖는 소리로 들린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과거가 있길래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다지도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일제(日帝)에 빌붙어 정작 부끄러운 짓을 한 자들은 작위(爵位)를 받고 부(富)를 축적하는데 그는 조국이 처한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에게 분노와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시 속에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미움, 가엾음, 그리움의 감정들이 교차한다. 그가 얼마나 내면 깊숙이 성찰과 반성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맹자는 생전에 ‘군자에게 있는 세 가지 즐거움’, 즉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하면서 두 번째 즐거움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을 말했다. 맹자는 또 사람의 본성 네 가지를 말하는 가운데 수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