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언어

  • 등록 2026.04.30 0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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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며느리와 사어머니가 있었다. 며느리는 무척 예의 바르고 완벽한 며느리였다. 시어머니의 어떤 분부도 언짢은 기색과 한 마디 군말 없이 순종 했고 끼니를 챙기는 일도 청소며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시어머니의 의복과 이부자리는 정갈하게 챙겨드렸고 세끼 식사는 물론 식간의 간식도 정성껏 챙겨드렸다. 동네에는 효부로 소문이 났고 모든 노인들은 그런 며느리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는 문지방에 목을 맸다.

 

며느리의 언행에는 흠 잡을 것이 없었지만 마치 로봇과 같았다. 예의는 발랐지만 다정다감하지 않았고 매사를 정성껏 챙겨 주었지만 애정은 없었다. 한 번도 말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흠 잡을 것은 없었지만 완고한 거리감은 좁힐 수가 없었고 매사에 부족함 없이 챙겨주었지만 시어머니의 외로움은 달랠 길이 없었다. 갈등을 일으켜 봐야 동네 인심은 며느리의 편일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음성 언어나 문자 언어 외에 ‘광의(廣義)’의 언어가 있다. 표정이나 억양, 손짓, 몸짓 등도 넓은 의미의 언어에 속한다. 깃발이나 총성 등도 이에 속한다. 때로는 무표정이나 무반응도 언어가 된다. 시어머니는 착한(?) 며느리에게서 풍겨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었던 것이다. 며느리는 비록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짐이 되고 있다는 중압감이 짓눌렀다.

 

아주 작은 표정 하나가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벌써 오래 되었지만 일간지에 주인공의 머리털 한 오라기로 다양한 표정과 상황을 연출하던 ‘고바우 영감’이라는 기발한 네 컷짜리 만화가 있었다. 상대에게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말을 했다가 분위기가 싸늘해진 경우도 있었고 문자를 주고받다가 물음표(?)를 보내야 할 곳에 느낌표(!)를 보내는 바람에 내 의도가 전혀 다르게 전달되어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문을 쾅! 하고 닫는 소리, 주방에서 들리는 유난히 큰 ‘달그락 거리는 소리’ 등도 모두 언어이다. 차를 운전하고 가닥 갑자기 예고도 없이 끼어드는 차를 보고 화가 나서 경적을 울리려 하다가 앞차가 비상등을 두어 번 깜빡거리면 화가 가라앉는다. ‘미안하다’는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세한 표정 하나 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억양 하나도 언어가 된다. 며칠 밤을 새며 준비한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 상사의 눈살 찌푸림이나 하품 하나는 모든 것을 무산 시킨다. 조소(嘲笑)나 무표정도 마찬가지다. 어떤 저명한 과학자는 수많은 강연 초청을 받았지만 평생 수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딱 한 번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앞줄에 앉은 사람이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나중에는 시계를 풀어 귀에 대 보더라는 것이다. 그때의 일은 커다란 상처가 되었고 다시는 초청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고 한다.

 

억양도 그렇다. 지난 날 직장 동료가 기르던 개가 있었다. 덩치가 송아지만한 청삽살이였는데 주인이 “기다려~” 그려면 먹고 “먹어!” 그러면 기다린다. 이번에는 “먹어~” 그러면 먹고 “기다려!” 그러면 기다린다. 주인이 말하는 ‘기다려’나 ‘먹어’라고 하는 의미를 모르고 주인의 음성이 부드러운지 단호한지에 의해 나름 상황 판단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언어가 호의적이지 인사치레인지 속으로 화가 났는지 아닌지 억양이 미세한 차이를 만든다.

 

학교에는 대게 매사에 부드럽고 친절한 선생님과 독설가로 유명한 선생님 두 부류가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독설로 유명한 선생님은 아무도 존경하지 않을 것 같지만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이는 선생님의 독설에는 독 대신에 제자를 향한 애정이 있음을, 독설 너머에 그 선생님의 사랑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언어 가운데 문자나 음성이 아닌 또 다른 언어가 더 진솔하기 때문이 아닐까?

 

 

 

▲ 최홍석 칼럼니스트

 

최홍석

전남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서울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교감 및 교장 정년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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