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윤 작가 에세이

  • 등록 2025.04.23 10: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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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싱, 다정함을 준비하는 시간


출근길, 버스 정거장에 섰다. 너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풍이 머리카락을 흔든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위로 벚꽃잎 무리가 하늘거리며 쏟아진다. 봄바람은 그렇게 온기를 빼앗아가면서도, 꽃잎 한 장으로 다시 다정해진다. 벚꽃이 흩날리는 아침, 눈을 감고 볼과 머리카락에 닿는 부드러운 봄바람을 음미해 본다.

 

도착한 강의실, 가방 안 다이어리를 꺼내려다 눈에 들어온 작은 벚꽃잎 한 장에 마음이 멈춘다. 누군가 나 몰래 살며시 넣어주었을 법한 다정함이다. 바람에 실려왔는지 가방 틈으로 들어온 봄바람의 토닥임이 정겹기만 하다. 그 순간, 다가온 울컥함. 아무 말 없이 건네오는 봄의 인사에 눈가가 따뜻해져 온다.

 

꽃잎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커피를 추출한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필터지를 접어 드리퍼에 끼우고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부우며 필터지를 최대한 드리퍼에 밀착시킨다.

 

필터커피를 추출할 때 드리퍼의 필터지에 물을 부어 미리 적셔주는 과정을 린싱(rinsing)이라 한다. 미세하게 있을 수 있는 종이 냄새와 맛을 제거하고, 필터와 드리퍼를 밀착시켜 리브(Rib)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커피가 추출되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물의 흐름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뜨거운 물로 린싱을 하면서 드리퍼와 서버가 데워지기 때문에 원두에 닿아 흐르는 물의 온도와 추출된 커피의 온도가 유지되는데 도움이 된다.

 

린싱을 끝내고 서버에 담겨있는 물을 버리려 발걸음을 옮긴다. 김이 서버에서 은은하게 피어난다. 뜨거운 물이 지나간 자리, 손끝에 닿는 서버의 온기가 봄의 잔열처럼 사라지지 않고 커피의 추출을 기다리는 다정함으로 다가온다. 분쇄된 원두를 드리퍼에 담고 표면을 평평하게 고르며 살며시 내뱉는 숨과 함께 뜸을 들여준다. 커피가 숨을 쉬듯 원두가루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갓 피어난 꽃잎에 봄비가 닿듯 조심스럽게 작은 원을 그리며 물줄기를 부어준다. 추출의 순간은 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오로지 원두가루와 물, 그리고 나 사이의 숨결을 나누는 조용한 대화처럼.

 

원두가루 사이를 적시며 내려간 물이 천천히 서버에 담기기 시작한다. 대화를 마치듯 드리퍼를 살포시 들어 올리고, 커피가 고요하게 담겨있는 서버를 바라본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커피의 색, 마치 오늘 하루도 그렇게 흘러가길 바라는 나의 마음과 같다.

 

벚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어느 봄날,

매번 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는 봄은 올해 나에게 한 장의 꽃잎과 한 잔의 커피로 다가왔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도 가끔 이렇게 멈춰 서서 계절의 숨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커피는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나를 다독인다.

 

오늘의 커피가 특별한 이유, 그건 서버에 담긴 건 커피가 아니라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벚꽃잎 한 장이 전해준 따뜻한 아침처럼, 나는 커피 한 잔을 통해 내 하루를 조용히 받아낸다.

 

벚꽃은 결국 지고 바람은 다른 곳을 스치겠지만,

오늘 이 아침에 함께한 따뜻한 온기만은 잔잔하게 오래도록 남기를.

그래서 그 온기가 당신의 다정함이길.

 

 


 

 

임지윤

 KCIGS 센서리 심사위원

 2024 국제요리&제과경연대회 칵테일 라이브 심사위원

 2022 MOC (마스터오브카페) 센서리 심사위원

 AST(Authorized SCA Trainer)

 Q-GRADER (국제아라비카 감별사)

 R-GRADER (국제로부스타 감별사)

한국외식조리사중앙회 대외협력이사

 2024 대한민국 眞心교육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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