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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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이라는 집단적 환각과 엘리트주의의 그늘

진보학자들은 역사는 나선형을 이루며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가 때로는 후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도 결국 한 사회와 문명은 순간의 아픔과 시련, 고통을 겪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 가운데서 일견 역사는 정체되고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왜냐면 우리는 이러한 역사관의 밑바닥에 깔린 오랜 왜곡과 편견의 깊이를 재확인하며 정서적, 심리적으로 씁쓸함과 고독감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우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학벌이라는 뿌리 깊은 내면 의식이 얼마나 왜곡되고 편견이었으며 견고한지 똑똑히 목도했다. 최고 학부(대학)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정규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의 정점에 선 지도자조차 끊임없는 의구심과 교묘한 비아냥, 기득권층으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시대가 흐른 지금 이재명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관성과 집단적 편향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확인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고교 과정을 생략한 채 소년공으로 공장 바닥을 굴렀고, 이후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의 자격을 얻어 지방 행정의 일선에서 시장, 도지사의 경험을 쌓고 최종적으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음에도, 소위 ‘엘리트’라 자부하는 집단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은근한 차별과 무시는 여전히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온갖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표현의 자유’나 ‘합리적 비판’이라는 명분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최고 학부나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다는 자만심과 오만으로 “네가 감히 우리와 동등한가?”라는 잠재된 거부감이 짙게 배어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노골적인 집단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은근히 그리고 교묘하게 작동하여 이를 분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비단 정치적 지도자뿐만이 아니다. 비서울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여 ‘성골’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한(恨)으로 품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남다른 노심초사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버텨야 했던 수많은 인재들의 인생 역정은 이 사회가 얼마나 지독한 학벌이라는 환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다.

 

​우리는 학벌이 ‘능력’의 객관적 지표라고 믿도록 세뇌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드러나는 학벌 카르텔의 실상은 ‘능력 검증’이 아닌 ‘집단적 폐쇄성’에 가깝다. ​몇 년 전 한 대기업의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드러난 사례는 한국 사회 학벌 편향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준다. 출신 대학별로 등급을 매겨 서류 전형 점수를 차등 부여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해당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효율적인 검증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정작 입사 후 수년이 지난 시점에서 직무 성과와 조직 기여도를 분석했을 때, 고득점을 받은 특정 대학 출신들과 지방대 및 전문대 출신 간의 성과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정 대학 출신들이 끼리끼리 파벌을 형성해 조직 내 다양성을 해치고 리더십의 경직성을 초래한 부작용이 더욱 컸다. 이는 최근에도 그들의 “뇌 썪음(brain rot)”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태로 오히려 사회의 기대를 크게 저버리거나 실망을 안기는 행태로 나타나고 있다.

 

​스타트업과 창업 생태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관찰된다. 서울대·KAIST 등 특정 학벌 출신 창업자가 초기 투자금을 유치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하지만, 실제 기업의 생존율과 글로벌 성장성을 결정짓는 것은 출신 대학의 간판이 아니라 현장 감각과 과감한 실행력, 그리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었다. 즉, 무시당하고 평가에서 밀렸던 사람들의 약진과 창의성이 오히려 높이 평가를 받은 것이다.

 

소년공처럼 인생의 결정적 도약의 시기에 처절한 야생적 생존 경험이나 독학을 통해 습득한문제 해결 능력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실전 역량’으로 판명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10대 시절 치른 단 한 번의 시험 성적으로 택한 최고 학벌이 사람의 평생 가치를 결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제 ​학벌에 대한 내면화된 차별의식을 불식시키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성찰에만 의존할 수 없다. 구조적·제도적 불합리함을 깨부수는 대담하고 획기적인 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첫째, 공공 및 민간 부문의 ‘블라인드 채용’ 및 ‘역량 중심 평가’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출신 학교명을 숨기는 차원을 넘어, 개인이 살아온 종합적인 삶의 궤적과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포트폴리오 중심 평가 체계’로 전면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다. 학력 입력란 자체를 폐지하고, 해당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떠한 실전 경험과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검증하는 정성적·실증적 평가를 제도화할 필요성이 크다.

 

​둘째, 고등교육의 ‘서울대 집중 구조’를 해체하는 대학 구조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국립대학 통합 네트워크 구축이나 지방 거점 국립대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특정 대학에 부와 권력, 인재가 독점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깨뜨려야 한다. 현 정부의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정책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인권과 선진 문명을 선도한 ‘퍼스트 펭귄’ 프랑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뿌리 깊은 학벌의 상징이었던 파리 소르본느 대학을 해체하고 대학을 통합하여 학벌 서열을 완화했듯, 우리도 대학의 이름이 계급이 되는 현실을 구조적으로 해체하는 정책적 결단이 시급하다.

 

​셋째,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다양한 ‘성장 경로’에 대한 사회적 격차 해소가 필요하다. 검정고시, 독학사, 직업 훈련 등 정규 학위 이외의 경로로 역량을 증명한 인재들에게 명확한 사회적 인센티브와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소년공 출신이든, 독학생이든, 독자적 기술을 익힌 장인이든 간에 ‘어떻게 배웠는가’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평가받는 사회적 표준을 명확하게 확립해야 할 것이다.

 

​학벌주의는 단순한 선입견을 넘어, 타인의 삶과 성취를 비아냥대고 폄훼하는 나쁜 자만심과 오만의 온상이 되었다. 특정 학교의 간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치열한 생존과 노력을 ‘무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10대 시절의 시험 성적표 하나로 평생의 계급을 나누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오히려 그런 대우를 받으며 기대를 모은 최고 엘리트들이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오점을 남기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제 우리 사회는 스스로 겪어낸 시련의 크기와 이를 극복해 낸 삶의 역경이야말로 그 어떤 명문대 졸업장보다 값진 지혜의 증거임을 인정하는 국민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교육과 사회는 학벌이라는 환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한때 가정환경으로 대학의 비용을 스스로 마련하고자 했던 이유로 이 나라 최고 대학에 다가서지 못해 평생의 ‘한’을 안고 살아가는 지식인도 많다. 간판이라는 화려한 껍데기 대신, 인내와 개척 정신으로 증명된 인간의 진정한 ‘실전 역량’을 온전히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전재학 칼럼니스트

 

·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교육학 석사
· 인천과학고 외 7개교 영어교사
·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세원고 교감
· 인천 산곡남중 교장
· 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 주간교육신문, 교육연합신문 외 교육칼럼니스트 활동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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