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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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눈물, 우리는 과연 책임이 없는가?

​2026년 8월 26일, 히말라야에서 녹은 빙하가 거대한 물과 토사로 변해 마을과 도로를 휩쓸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사라졌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만년설 아래 위치한 네팔의 마을에 발생한 토사포쇄(土砂暴碎)는 끔찍하게 마을 전체를 삼켰고, 그 참극은 네팔의 눈물이자 전 세계인의 양심과 책임을 일깨우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자연재해(Natural Disaster)’라고만 부를 수 있는가? 아니다. 이것은 자연의 참사가 아닌, 문명의 방조가 낳은 ‘인재(人災, Human-made Disaster)’이자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기후 불평등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히말라야의 비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묵직하고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네팔의 재난 앞에, 과연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비극의 역설: 온실가스 0.03%의 나라가 짊어진 십자가

 

​기후위기의 가장 참혹한 진실은 ‘피해와 책임의 불공평함’에 있다. 탄소를 배출하여 문명의 풍요를 누린 이들과, 그 탄소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아내는 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데이터는 이 지독한 불평등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과 글로벌 탄소 프로젝트(Global Carbon Project)의 통계에 따르면, 네팔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단 0.03%에 불과하다. 반면, 상위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과 산업화된 국가들이 배출하는 탄소는 전 세계 배출량의 과반을 넘어서고 있다.

 

​네팔의 주민들은 대형 SUV를 작동하지도, 거대한 공장을 돌려 부를 쌓지도 않았다. 그저 히말라야의 경사면에서 소박하게 밭을 일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명 세계가 뿜어낸 온실가스로 히말라야의 빙하는 20년 동안 정상 속도보다 수배 빠르게 녹아내렸고, 그 폭발적인 물줄기는 가장 가난한 이들의 삶터로 쏟아져 휩쓸었다.

 

여기서 잠시 현실적인 통계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가장 가난한 50%의 세계 인구는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12%만을 배출하고 있다.(Oxfam & Stockholm Environment Institute, 2020). 하지만 ​가장 부유한 10%의 세계 인구는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가? 선진국과 대도시의 과도한 소비와 에너지가 만들어낸 ‘편리함의 대가’를, 히말라야 오지의 사람들이 목숨으로 지불하고 있다면 말이다.

 

기후위기는 환경 문제가 아닌 ‘정의(Justice)’의 문제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후위기를 유치원 아동들의 교육 현장에서부터 단순히 “북극곰을 구하자!”, “지구가 불쌍해요!” 라는 식의 생태적 보존 문제로 치부해 왔다. 그러나 네팔의 비극은 기후위기가 본질적으로 ‘인권의 문제’이자 ‘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의 문제임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그의 저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한 사회의 정의로움은 “가장 약한 자에게 얼마나 공평한 기회와 보호가 돌아가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를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적용한다면, 현재의 세계 체제는 극도로 ‘부정의(Unjust)’하다 할 수 있다.

 

국제구호개발기구인 옥스팜(Oxfam)의 보고서 《기후 불평등의 파악(Confronting Carbon Inequality)》에 의하면 “탄소 배출로 부를 축적한 국가들이 만들어낸 피해를, 정작 아무런 혜택도 보지 못한 가난한 국가들이 감당하는 기후 아파르트헤이트(Climate Apartheid)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팔의 이재민들이 흘리는 눈물은 단순히 비가 많이 와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후 폭력의 피해자들이 흘리는 억울한 통곡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무심코 켜두는 에어컨, 쉽게 버리는 플라스틱, 과도한 육식과 자원 남용은 국경을 넘어 히말라야의 빙하를 녹이고 누군가의 집을 삼키는 일종의 ‘원격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교실에서 시작하는 ‘기후 정의’와 세계시민교육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이 비극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교실은 단순히 분리수거 방법을 가르치는 차원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구조적 책임을 통감하는 평화·지구시민’을 길러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 방안으로서는 ​첫째, ‘공감(Empathy)’ 교육에 달려있다. 이는 타인의 눈물에 응답하는 감수성으로 ​지식보다 먼저 배워야 할 공감 능력이다. 네팔의 아이들이 학교를 잃고, 부모를 잃은 슬픔을 남의 나라 일로 치부하지 않고 내 이웃의 아픔으로 껴안을 수 있는 도덕적 감수성을 키워주어야 한다. 교육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연대(Solidarity)’ 교육에 달려있다. 이는 기후 부채(Climate Debt)의 인식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선진국과 산업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는 가난한 국가들에 ‘기후 부채’를 지고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2022년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타결된 ‘손실과 보상 기금(Loss and Damage Fund)’처럼, 기후위기 피해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과 연대가 단순한 시혜나 자선이 아닌 정당한 부채의 상환임을 학생들이 인식하게 해야 한다.

 

​셋째, ‘행동(Action)’ 교육에 달려있다. 이는 소비의 주체에서 정의의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개인적 차원의 실천(에너지 절약, 자원 재활용 등)을 넘어, 기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구조적·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북유럽 스웨덴의 어린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그 상징적인 존재다. 친환경 정책을 지지하고, 기업의 탄소 배출을 감시하며, 기후 정의를 외치는 청소년 기후 행동에 동참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지구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이는 유명한 인디언 속담(Native American Proverb)이다. ​네팔의 참혹한 재난은 ‘먼 나라, 남의 일’이 결코 아니다.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아 흙더미로 변했듯,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기적인 풍요의 대가는 언젠가 우리 자신의 삶의 터전을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은 풍요는 지속될 수 없으며, 불의한 침묵은 또 다른 폭력이라 할 것이다. “네팔의 재난,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 이 질문 앞에 당당히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 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지구촌의 공범이자, 동시에 연대해야 할 운명공동체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게 정답을 맞히는 지혜를 넘어, 타인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줄 아는 ‘도덕적 용기’를 가르쳐야 한다. 히말라야의 차가운 흙더미 속에서 스러져간 이들을 향한 진한 공감과 성찰, 그리고 지금 당장 시작하는 작은 행동만이 침몰해 가는 지구라는 배를 구하는 유일한 방책이라 믿는다. 이번 참사에 운명을 달리하고 상처와 부상을 입은 모든 희생자에게 명복을 빌며 따뜻하고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 전재학 칼럼니스트

 

·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교육학 석사
· 인천과학고 외 7개교 영어교사
·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세원고 교감
· 인천 산곡남중 교장
· 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 주간교육신문, 교육연합신문 외 교육칼럼니스트 활동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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