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흙먼지 날리는 충청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의 일이다. 뙤약볕 아래 애써 물을 대어놓은 다랭이 논에 나가보면, 밤새 귀한 논물이 감쪽같이 빠져나가 바닥이 말라붙어 있을 때가 있었다. 범인은 십중팔구 논둑에 몰래 구멍을 뚫어놓은 ‘움지(드렁허리)’였다.
뱀처럼 길쭉하고 미끈거리는 이 녀석은 진흙 속을 파고들어 단단해 보이던 논둑을 안에서부터 허물어뜨리는 농부들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화가 난 김에 녀석을 잡아다 키우는 돼지들에게 던져주면 그만한 특식이 없었다. 그러나 돼지들이 쩝쩝거리며 살을 찌우는 사이에도 나는 허물어진 논둑을 다시 진흙으로 막아야 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교육 현장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문득 그 시절 논둑을 무너뜨리던 드렁허리를 떠올린다. 벼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여물려면 논에는 늘 물이 차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모든 교과 학습은 ‘문해력’이라는 물 위에서 자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육의 논둑은 곳곳이 뚫려 그 소중한 물이 새어나가고 있다. 이른바 ‘문해력 위기’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의 논둑을 안에서부터 갉아먹은 ‘교육 드렁허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에 담아 놓은 '소릿값 규칙'이라는 근본 원리를 가르치기보다, 글자의 모양을 통째로 외우게 만든 암기식 한글 교육이다.
현재 초기 한글 교육은 훈민정음 특유의 과학적인 소릿값 규칙 중심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형성된 암기 중심 교육 풍토의 영향 속에서 글자의 형태를 익히는 통글자 암기와 반복 학습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 방식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이미 본 글자는 쉽게 읽지만, 처음 보는 글자 앞에서는 기억과 짐작에 의존한다. 글자와 소릿값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과만 외우는 학습은 스스로 읽고 해결하는 힘을 약화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원리보다 암기에 의존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프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학습 수준과 지역 환경이 다른 초등학교 4학년을 대상으로 단어를 미리 알리지 않고 두 차례(2009년, 2011년) 실시한 ‘예고 없는 받아쓰기’ 결과를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전체 학생의 65.45%가 80점 미만으로 ‘깨침 부진’ 판정을 받았다. 이는 우리 아이들 10명 중 6명 이상이 글자의 원리를 활용한 읽기보다 형태 기억과 짐작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글의 소릿값을 스스로 계산하는 ‘뇌 연산 회로’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이른바 ‘뇌 연산 미완성’ 상태를 시사한다.
이러한 교육 방식의 한계는 최근 공교육 현장 지표로도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교육부의 기초학력 진단(2023) 결과 초등학교 3학년의 국어 성취도가 약 7~8%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읽기 성취 격차 확대와 기초학력 미달 학생의 증가는 우리 교육계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문해력 위기의 중요한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구멍 난 논둑을 메우는 길은 세종이 남긴 설계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한글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수학처럼 일정한 규칙으로 작동하는 과학적인 문자 체계다. 누구나 그 원리를 이해하면 처음 보는 글자도 스스로 읽고 쓸 수 있도록 설계된 문자다.
필자는 이를 위해 ‘소릿값 중심 한글 교육’을 연구해 왔다. 아이들은 글자를 통째로 외우는 대신 소릿값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 글자를 읽도록 배운다. 초등학생 아이가 ‘ㅏ’와 같은 글자를 보고 따라 쓸 때, 그저 획순과 모양을 사진 찍듯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닿소리와 홀소리가 결합하는 규칙 속에서 스스로 소릿값을 계산해 내는 논리적인 연산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교수법이 아니라, 아이들의 뇌에 글자를 기억이 아닌 원리로 처리하는 ‘논리 연산 회로’를 굳건히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한글을 빨리 읽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규칙을 찾고 비교하며 추론하는 사고 과정은 문해력은 물론 다른 교과를 이해하는 힘으로 이어진다. 40여 년의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변화를 꾸준히 확인해 왔다.
아무리 좋은 비료를 뿌리고 최신 농법을 도입해도 논둑이 무너지면 벼는 결코 여물 수 없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문해력이라는 논둑에 난 구멍을 그대로 둔 채 독서교육을 늘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암기하는 한글에서 연산하는 한글로!” 세종이 남긴 설계도를 교육의 출발점에 다시 세워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교육 당국과 현장의 교사들은 우리 교실의 한글 깨침 첫 단추가 무작정 외우는 ‘암기’인지, 스스로 깨치는 ‘연산’인지부터 냉정하게 점검해야 한다. 아이들의 뇌가 스스로 소리를 계산하고 원리를 발견하는 힘을 기를 때 비로소 문해력의 논둑은 다시 단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단단한 논둑 위에서 우리 교육도 비로소 깊고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 장덕진
전 초등교사(정년퇴임)
규칙과학 ‘소릿값 내기 한글’ 연구소장
훈민정음을 40여 년간 초등교육 현장에 적용하며 「소릿값 내기 한글」 원리를 연구해 온 현장 연구자
[대한민국교육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