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에서 이영란 봉담고 교장의 말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학생자치회실의 3D 설계와 도서관의 동선, 모듈러 교실의 디지털 환경, 한 학생의 마음을 지키는 또래상담과 화해중재, 교사의 수업 공개와 AI 서·논술형 평가, 학부모와 함께한 학교 앞 교통 캠페인까지. 하나의 사례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실천이 이어졌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열정이었다. 그러나 그 열정의 방향은 한결같았다. 학생을 더 존중하고, 교사가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며, 학교와 지역이 함께 성장하는 것. 이 교장이 거듭 강조한 말도 그래서 “AI 대전환의 시대일수록 기술보다 인간의 존엄, 속도보다 방향성”이었다.
봉담고는 이 교장에게 각별한 학교다. 2008년 개교 당시 교사로 부임해 4년 동안 학생들과 울고 웃었던 이 교장은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이 학교로 왔다. 그러나 되돌아온 학교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개교 이후 15년 넘게 큰 변화 없이 낡아버린 시설, 과밀학급, 디지털 교육환경에 대한 무관심, 수업·평가 전문성의 편차가 동시에 놓여 있었다. 반면 비교적 젊은 교직원과 성장 의지가 강한 중간 리더들은 봉담고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이었다.
이 교장은 문제를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학교의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을 데이터로 분석하고, 흩어져 있던 과제를 네 가지 경영 시스템으로 묶었다. ‘평화롭고 안전한 학교 환경’, ‘학생주도성을 이끄는 수업 실천과 공유’, ‘교직원 전문성 향상과 협력’, ‘공적 가치를 지향하는 공동체 동반 성장’이다. 교육과정 평가회, 신임 부장 워크숍, 신학년 워크숍, 온라인 교무실을 통해 방향을 반복해서 공유하고 실행 결과를 다시 공개했다. 열정을 개인의 헌신으로 소진하지 않고 학교의 일상과 루틴으로 바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논쟁과 설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공감은 좋은 말 대잔치나 칭찬의 립서비스가 아니에요. 리더십의 시작은 교육공동체의 마음을 얻는 일입니다.”
학교로 돌아온 뒤 이 교장이 교직원과 학부모에게 한 약속도 같은 맥락이었다. “제가 몸으로 먼저 뛰고, 먼저 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장이 되겠습니다.” 인터뷰에서 확인한 수많은 실천은 그 약속을 지켜온 기록에 가까웠다.
◆ 학생이 설계한 자치회실, 마음까지 안전한 학교
학교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학생이 가장 먼저 체감하게 하려면 무엇부터 바꿔야 할까. 이 교장은 공간에서 출발했다. 학생자치회 홍보부장이 직접 3D로 설계한 학생자치회실을 새로 꾸몄다. 학생자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교직원과 학생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학교 교육활동의 허브가 될 도서관은 학생·교사·학부모가 참여하는 사용자 중심 설계로 전면 재구성했다. 그렇게 탄생한 ‘별담서재’는 책을 빌리는 장소를 넘어 디지털 융복합 배움터가 됐다.
별담서재에서는 해외 교류 사전교육, 과학중점학교 지역 나눔 활동, 교사 수업 연구와 AI 활용 특강, 학부모 연수와 독서동아리 ‘별담책마루’가 이어진다. 학생들은 또래 추천 도서를 직접 고르고 전시하며 뉴스레터를 만든다. 초·중·고 10개교 이상과 교장·교감 협의회, 사서 연구회가 이 공간을 찾았고, 국립중앙도서관·국회전자도서관과의 연계도 넓혔다. 도서관이 학교 안팎을 잇는 교육 플랫폼이 된 셈이다.

과밀 해소를 위한 모듈러 증축과 본관 공간 재구조화, 미래융합학습실·스터디카페·학생 작품 전시 공간·생태연못 재생도 동시에 진행됐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공간보다 만드는 과정이었다. 학생과 교직원의 불편을 수시로 모니터링하고, 설계와 개선 결과를 공유했다. ‘말하면 바뀔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학생자치의 수업이 됐다.
이 교장이 말하는 안전은 시설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클래스를 중심으로 학년별 또래상담 프로그램을 내실화하고, ‘느린 우체통’과 디지털 성범죄 예방 캠페인을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게 했다. 2025년 준비학교에서 2026년 실천학교로 확대한 ‘마음공유’ 프로그램에서는 전 교원이 15시간 연수를 이수하고 화해중재 예비모임과 본모임을 실습했다. 학부모에게는 비폭력대화(NVC)를 안내했다. 사고가 없는 학교를 넘어, 갈등을 말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 수업을 열고 연결하자 학생의 주도성이 자랐다
공간이 변화의 무대라면 수업은 학교를 움직이는 본체다. 이 교장은 모든 교사의 수업을 짧게라도 직접 본다. 교사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실의 와이파이와 디지털 기기, 공간 지원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피고 자신도 배우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교사들도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일상의 수업을 연다. 봉담고가 수업 공개를 평가의 시간이 아니라 함께 배우는 시간으로 바꾼 결과다. 화성오산 수업나눔 한마당, 하이러닝 CLASS UP 활용 수업, AI 기반 서·논술형 평가 수업도 교내외에 공개했다. 영어 수업에서는 실시간 진단과 피드백을 바탕으로 ‘다양성 포용’을 주제로 모둠 활동과 영어 연극을 진행했고, 정보 수업에서는 글쓰기와 파이선 프로그래밍을 개인별 맞춤 학습으로 연결했다.
학생주도성은 교실 밖에서 더 선명해졌다. 2022년부터 이어온 국제교류는 온라인을 거쳐 2024~2025년 오프라인 교류로 확대됐다. 필리핀·캐나다·대만 학교와 연결하고, 2025년 대만 뤠이샹고등학교 상호 방문 때는 학생이 학교장 인사말을 통역했다. 대만 학생들은 희망 수업을 미리 선택했고, 봉담고 학생들과 모둠수업과 동아리 활동, 릴스 제작을 함께했다. 학생이 행사의 관객이 아니라 통역자·기획자·학습 파트너가 된 것이다.
경기도형 과학중점학교 운영도 공적 역할과 학생 선택을 함께 살렸다. 중학생 대상 고급과학 공유수업, ‘내 꿈을 스케치하다’, 지역사회 문제 해결 제안, 사회적 약자 배려 정책 제안, 3학년 진로 심화 교과융합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이 질문을 만들고 조사하며 결과를 공유하게 했다. 학부모 공개수업 뒤에는 참관록을 통계·마인드맵·인포그래픽으로 분석해 다시 수업에 반영했다. 학생주도성은 단순히 선택권을 주는 일이 아니라, 학생의 목소리가 수업 설계와 다음 의사결정에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 “사업마다 새 일을 만들지 말자”…정책을 교사 성장의 마중물로
학교 혁신이 지속되려면 교사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이 교장은 “속도보다 방향성”을 교직원 전문성 체제의 첫 원칙으로 삼았다. 2월 교육과정 워크숍과 교육과정 평가회에서 책으로 학교의 큰 방향을 전하고, 교직원 지식 나눔과 전문적 학습공동체, 교사 동아리, 디지털 튜터를 촘촘히 연결했다. 교장부터 새로운 도구를 배우고 수업·평가 연구에 참여하는 솔선수범도 빼놓지 않았다.
학교가 여러 정책사업을 추진하면 교사 피로도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이 교장은 ‘사업마다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잘하고 있던 교육활동을 온라인 교무실에 기록·공유하고, 그 활동에 맞는 정책과 예산을 연결한다. 부서 간 자료를 공동으로 활용해 보고 부담을 줄이고, 확보한 자원은 다시 학생 교육활동에 투입한다. 정책사업을 업무의 덧셈이 아니라 성장의 마중물로 바꾼 셈이다.
대표 사례가 2025년 AI 기반 서·논술형 평가 시범연구회에서 출발해 2026년 실천학교로 확장된 ‘봉담!쓰담!’이다. 연구회를 제안하며 이 교장은 “선생님들만 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같이 하고 진행도 맡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명령이 아니라 동행을 택하자 참여가 자발적으로 늘었다. 이름에는 ‘봉담 공동체가 함께 성장하고, 쓰기 평가로 미래역량을 담으며, 서로를 쓰담쓰담한다’는 뜻을 담았다. 교사들은 AI 피드백과 교사의 전문성을 결합해 대규모 수행평가 채점, 학생별 강점·약점 분석, 프로젝트 수업, 학교생활기록부 서술에 적용하고 결과를 공동 발표와 사례집으로 나눴다.
기술을 무조건 앞세운 것은 아니다. 단답형에는 약하고 맥락 이해에는 강한 AI의 특성을 함께 검토하고, 성취수준별로 모든 학생이 답할 수 있는 문항과 루브릭을 교사가 공동 설계했다. 이 교장은 원칙을 분명히 했다. “AI는 학생 답안에 대한 피드백을 하고, 교사는 학생의 맥락을 이해한 피드백을 해야 합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배우고, 실천하고, 나누는 교사’가 디지털 전환을 인간적인 교육으로 만드는 핵심이라는 뜻이다.
◆ 학부모를 민원인이 아닌 교육의 주체로
네 번째 시스템의 중심에는 공적 가치가 있다. 학교 안의 변화가 특정 학생과 교사만의 혜택에 머물지 않고 학부모와 지역, 다른 학교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철학이다. 봉담고는 학부모 연수에서 학교의 경영 철학과 교육활동, 학부모회의 역할을 함께 설명하고, 독서동아리 ‘별담책마루’를 운영했다. 회복적 정의와 비폭력대화, 화해중재를 다루며 학부모를 민원인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이자 문제 해결의 동반자로 세웠다.
갈등을 피하거나 덮는 대신 절차와 투명성으로 신뢰를 쌓았다. 2024년 학교로 돌아왔을 때 오랫동안 쌓인 학부모 요구와 민원을 모두 모으니 30쪽에 달했다. 부서별 답변과 조치 내용을 정리해 공개하고, 그 뒤에도 자료에 없는 요구라면 언제든 마음을 열고 듣겠다고 알렸다. 민원전담반 운영, 교육청 법률자문과 지원청 협력, 부장 협의, 행정 절차 준수, 홈페이지 결과 공유도 하나의 대응 체계로 만들었다. 학교 앞 주정차 문제는 화성서부경찰서·봉담장학회·학부모회가 함께 캠페인을 벌였고, 스마트폰 바른 사용과 엘리베이터 이용 문제도 공동체가 함께 풀었다. 온라인 교무실과 협업 기반 업무분장, 교직원 지식 나눔은 학교 안의 경험을 개인에게 묶어두지 않고 공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2025년 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교사 설문에서는 응답자 41명 중 30명(73.1%)이 ‘만족’ 또는 ‘매우 만족’이라고 답했다. 이 교장이 더 주목한 것은 만족도 숫자만이 아니었다. 불만족 의견도 재설문으로 구체화하고, 조치 결과를 온라인 교무실에 공개하도록 했다.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해결 과정까지 공유해야 공동체가 학교를 신뢰한다는 판단에서다.
이 교장은 학교의 성장 단계를 2024년 ‘소속감과 관계 만족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문화’, 2026년 ‘자율과 인정의 문화’, 그다음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학교문화’로 그린다. 15년 넘게 정체됐던 학교가 새롭게 태어났다는 평가는 그래서 시설이 좋아졌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공간과 수업, 교사의 배움과 공동체의 신뢰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에 가깝다.
인터뷰 내내 이 교장의 열정은 강렬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이 교장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교장이 앞세운 것은 자신의 성과가 아니라 학생의 변화, 교사의 성장, 학부모의 참여였다. 한 사람의 속도로 학교를 끌고 가기보다 모두가 함께 갈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이 지속되도록 시스템을 남기는 것. 봉담고를 다시 뛰게 한 이영란 교장의 교육철학은 그 한 문장으로 모인다. 기술보다 인간의 존엄, 속도보다 방향성, 그리고 교육공동체의 마음을 얻는 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