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시간의 힘
옷장 문을 열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 언젠가 입겠지, 하며 버리지 못한 옷들. 비싸게 샀다고 억지로 걸어둔 원피스. 그런데 막상 입는 건 늘 비슷한 옷 몇 벌뿐이다.
토요일 오후. 잠시 정리하려고 했는데, 하나씩 꺼내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옷 산더미가 쌓였다. 이걸 내가 다 갖고 있었나 싶다. 결국 절반 넘게 버리고 나서야 마음이 후련했다. 옷장 안 옷들이 숨 쉬는 것 같았고, 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왠지 모르게 너무 좋다. 단순히 정리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뭔가 내 몸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
내가 일하는 헌혈의 집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혈액을 본다. 투명한 백으로 흘러들어오는 빨간 혈액. 처음엔 그냥 다 똑같아 보이지만, 혈액 속 성분의 무게에 따라 층이 분리되면 보인다.
혈액마다 다르다는 것이.
어제도 그랬다. 30대 남자분, 혈소판 성분 헌혈 전 검체를 원심분리기로 돌렸더니 혈액이 뿌옇게 보였다. "어제 뭐 드셨어요?" 물었더니 역시나 회식이었다고 하셨다. 삼겹살에 소주. 무척 미안해하시는 표정, 괜찮다고, 다음에 다시 오시라고 했지만, 사실 묻고 싶었다.
‘이분은 오늘 처음일까, 아니면 매일 이런 식으로 먹는 걸까?’
반대로 혈액이 맑은 분들도 있다. 레몬색으로 맑고 깨끗하게 흘러나온다. 그런 분들한테는 꼭 물어본다.
"운동하세요? 식단 관리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그렇다고 한다. 한 번은 60대분이 오셨는데, 혈액이 정말 맑았다.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하루 한 끼만 드신다고 했다. 무려 20년째. 처음엔 놀랐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몸이 가벼워요. 머리도 맑고."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매일 다른 이의 혈액을 보면서도 내 혈액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고 살았다.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챙겨 먹고, 야식까지. 부담 없이 먹는다. 내 몸은 24시간 내내 소화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침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았고, 항상 뭔가 몸이 무거웠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게 간헐적 단식, 인터넷에서 본 방법으로 시작한 지 3개월이 다 되어간다고 한다. 16시간 굶고 8시간 동안만 먹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저녁 7시에 마지막으로 먹고, 다음 날 아침은 거르고, 점심 11시에 먹으면 딱 16시간. 적응되니까 힘들지 않고, 오히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속이 편하다며 나에게도 권했다.
의학적으로 이 과정은 '자가포식(autophagy)'이라 불린다. 몸이 스스로를 청소하는 시스템. 마치 옷장을 비웠을 때 먼지를 털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공복 상태에서 우리 몸은 비로소 내부 청소를 시작한다.
혈액 속 과도한 당분이 줄어들고, 인슐린 수치가 안정되며, 오래된 세포들이 분해되어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된다.
밥 먹고 소화하느라 정신없을 때는 못 하던 일들을. 옷장 정리할 때 생각했다. 빼곡히 꽉 차 있을 땐 손댈 수가 없다. 비워야 청소를 할 수 있다.
나도 요즘 식단 관리를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몸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다. 머리도 맑다. 이게 혈액이 깨끗해져서 그런 건가 싶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냥 뭔가 달라진 게 느껴진다.
옷장 정리하면서 배운 진리. 많이 갖고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적당히 비워야 숨통이 트인다는 걸. 혈액도 똑같은 것 같다. 쉴 새 없이 뭘 먹으면 몸이 지친다.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내 옷장에는 진짜 입는 옷들만 있다. 하나하나 자리가 있고, 아침마다 뭘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내 혈액도 그랬으면 좋겠다. 꼭 필요한 것들만 깨끗하게 흐르는 혈액.
비우는 게 잃는 게 아니었다. 비워야 진짜 중요한 게 채워진다.
옷장도, 혈액도, 삶도.

정영희 작가
· 대한적십자사 혈액원 간호사
· 혈액관리본부 직무교육강사
· 2025대한민국 眞心교육대상 수상
· 최경규의 행복학교 자문위원
[대한민국교육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