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혈류: 말하지 못한 감정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것 같은 사이가 있다. 이렇게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사소한 말 한마디로 때로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모두 이해해줄 것 같은 든든했던 관계, 그러나 그런 나의 믿음과는 달리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에 당황할 때가 있다.
길지 않은 그 진공의 시간들 속에서,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불편한 간극이 존재했던 것일까?
오늘 오후 전화로 대화를 하던 중, 그의 말 한마디가 나의 감정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급격하게 차가워진 온도를 서로 확인하는 순간 침묵이 흐르고, 어색한 긴장감마저 감돌게 된다.
그가 한 말 그 자체는 그리 어렵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내 마음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의 실수도, 그의 실수도 아닐 수도 있었을 단어의 조합, 문장이었겠지만, 유독 내 기분을 힘들게 한 이유, 그 감정의 끝을 잡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누구에게나 건들지 말아야 할 역린(逆鱗)이 있을까? 사이가 멀어졌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그 역린을 건드린 일들은 모두 말에서 시작되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말은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지만 우리는 종종 사소한 말로 인해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한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일들은 더 자주 생기기도 하는 듯하다. 우리는 왜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쉽게 오해하고 멀어지게 될까? 그럴 때를 생각해보면 결국 '나를 이해해주지 못 한다'는 서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에 대한 기대가 크다면, 실망감이나 서운함은 더 크게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혈관이 막히면 혈액 공급이 중단되면서, 우리 몸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소를 몸 구석구석 전달 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언어장애, 마비, 어지럼증 등 우리 몸은 동시다발적으로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해는 둘 사이에 다가서기 어려운 유리벽을 만들고, 대화도 줄어들게 한다. 그러한 감정이 지속되면 둘 사이는 마치 차가운 얼음처럼 냉각되고 결국에는 쉽게 부서지고 만다.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나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혈관이 하루아침에 막히지 않듯, 관계의 틈도 한순간에 생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라고 넘기던 작은 서운함 들이, '뭐 굳이 말할 필요 있을까'라며 삼킨 불편한 감정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간다. 그렇게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가라앉고, 우리는 그것이 쌓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또 한 번의 작은 말 한마디가 터지듯 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 사이에 언제부터 이런 거리가 생긴 걸까?‘
피가 흐르지 못해 혈전이 생기면 동맥경화를 일으키듯, 대화도 흐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 별일 아닌 일들이 쌓여 마음의 혈전을 만들고 관계는 경직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전에 따뜻했던 관계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굳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라는 혈류를 계속 흐르게 하는 것이다. 혈전을 막기 위해 꾸준한 운동과 관리가 필요하듯, 관계 역시 지속적인 소통과 노력이 필요하다. 오해가 생겼을 때 그 감정을 묵혀두지 말고, 용기 내어 말해야 한다. "네가 한 그 말이 나를 힘들게 했어"라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막힌 혈관을 뚫는 첫걸음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이기에 더 조심스럽게, 더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상대의 역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에, 우리는 더 귀 기울여 듣고 더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 오후의 그 불편했던 순간, 나는 침묵 대신 대화를 선택하기로 했다. 차가워진 온도를 다시 데우기 위해, 굳어버린 관계를 녹이기 위해, 나는 다시 전화를 걸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아까 네 말이 나를 불편하게 했어. 우리 이야기해볼까?”
혈액이 멈추지 않고 흘러야 우리 몸이 살아있듯, 대화가 멈추지 않아야 관계도 살아있다. 때로는 어색하고 불편하더라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관계의 혈류를 건강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영희 작가
· 대한적십자사 혈액원 간호사
· 혈액관리본부 직무교육강사
· 2025대한민국 眞心교육대상 수상
· 최경규의 행복학교 자문위원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