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희의 건강한 행복

  • 등록 2025.08.18 23: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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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이 만드는 작지만, 아름다운 변화들


비 내리는 주말 아침, 지하철역에 내려 우산을 펼쳐 든다.

또르르 우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 소리가 내 마음까지 촉촉이 적셔주어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멜로디에 맞춰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본다. 이윽고 도착한 근무 장소는 강남에 있는 헌혈센터이다. 왠지 오늘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것 같다.

 

서둘러 가운을 갈아입고, 여느 때처럼 헌혈자 맞이를 위한 준비를 한다. 채혈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점검도 하고, 헌혈 후 제공할 급식품도 충분히 준비해둔다. 주말은 평일보다 센터를 방문하는 헌혈자가 많다. 그래서 주말 아침 간호사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비 내리는 날씨지만 평소 주말과 다름없는 예약자 리스트를 보며 호출 벨을 누른다.

 

“딩동” 501번 예약자님 문진실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데 문진실로 들어오는 헌혈자님의 표정이 어둡다.

혈압을 측정하는 동안 이전 헌혈 경력과 검사 결과를 확인해보며 어두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이어서 문진을 하는 중 그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엄마가 헌혈하는 것을 싫어해요.” 미성년자면 간혹 부모 반대가 종종 있지만, 성인의 경우 흔하지 않다

 

“부모님께서는 왜 반대하실까요?

 

“헌혈이 몸에 안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헌혈할 때만큼은 제가 살아 있다고 느끼거든요. 취직도 계속 안 되어 자존감도 떨어지고 요즘 정말 살아가는 게 힘든데, 헌혈할 때만큼은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30대 후반인 그는 누구에게라도 그의 힘듦과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과연 헌혈은 우리에게 안전한가?

 

우리 몸의 혈액량은 체중의 약 7~8%를 차지한다. 그중 15%의 혈액은 여유분으로 가지고 있어서 전혈 헌혈 시 채집되는 400mL 채혈량은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헌혈 후 일시적으로 줄어든 혈액량은 충분한 수분을 보충한다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이다. 또 헌혈 가능 주기와 헌혈 횟수를 법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서 채혈량은 안전한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고 있다.

 

간혹 감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채혈에 사용하는 모든 바늘과 혈액백은 멸균 처리된 일회용만 사용하고 있으며, 철저한 소독 절차 과정에 따라 채혈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헌혈하는 것은 내 몸의 일부를 직접 나누는 생명 나눔으로, 그 어떤 나눔보다도 소중하고 값진 기부라고 생각한다. 헌혈은 사고로 피를 많이 흘린 누군가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도 있고, 항암치료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혈액은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헌혈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그분의 표정은 아침과 달리 한결 밝아 보였다. 휴게실에서 제공된 음료를 마시며 "오늘 정말 잘한 것 같아요”라고 조심스럽게 미소 지으시는 모습에서, 헌혈이 단순히 혈액을 나누는 행위 그 이상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헌혈센터에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때로는 취업난으로, 때로는 일상의 무료함으로 지쳐있던 사람들이 헌혈 후에는 어김없이 달라진 표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 안에 숨어있던 선한 힘을 새롭게 발견한 듯한, 그런 표정 말이다.

 

작은 나눔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비가 그치고 해가 뜨듯, 우리의 작은 손길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씩 더 따뜻하게 만들어가고 있음을 믿어본다.

 


 

 

 

정영희 작가

 

대한적십자사 혈액원 간호사

혈액관리본부 직무교육강사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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